희망 선물하러 날아온 파란 눈 음악인들

27일 낮 서울 도심의 한 호텔 연회장에선 화려한 트럼펫 소리가 두드러지는 경쾌한 관악곡이 울려 퍼졌다. 헨델의 명곡 '왕궁의 불꽃놀이'에서 주요 대목을 발췌한 연주였다. 이 '작은 음악회'를 이끈 연주자들은 베를린 필하모닉 브라스 앙상블.

베를린필 브라스 앙상블은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실내악 앙상블이다. 세계 정상급 연주가들인 이들 12명은 28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서울·인천·부산·광주·고양 등 5개 도시에서 위탁 가정 아이들과 장애 아동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대 작곡과 학생이 아리랑의 전통 가락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아리랑 판타지'를 엔딩곡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이들을 초청한 곳은 인천에 위치한 중소기업이다. 창호 전문기업 이건은 문화기반시설이 취약한 지역 주민과 문화 소외계층 아동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1990년부터 매년 한 번씩 무료공연 '이건 음악회'를 열고 있다. 올해가 23번째. 초기엔 소방관 자녀 등 특수 직업군(群) 가정이 대상이었지만, 2008년 무렵부터는 어린이재단과 연계해 전국의 위탁 가정 아이들과 장애아동을 음악회에 초청하고 있다.

2007년부터는 유명 음악가가 문화 소외 계층 자녀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 '이건 마스터클래스'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베를린필 브라스 앙상블도 다음 달 1일 오후 인천의 시각장애인특수학교인 '혜광학교'를 찾아간다. 혜광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한 가지 악기를 배워 매월 첫째 수요일 점심 시간에 학교에서 소규모 연주회를 열고 있다. 언젠가는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게 꿈이다. 브라스 앙상블 연주자들은 자신이 맡은 악기를 연주하는 혜광학교 학생들을 일대일로 지도하고, 20분간 합동 연주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 여성 금관악기 연주자인 호르니스트 새라 윌리스는 "시각장애인 아동들과 연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아주 기대된다"고 했다. 수석 트롬보니스트 크리스차드 괴슬링 교수(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는 "개인적으로 장애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음악'이 얼마나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는지, 그들을 얼마나 도와줄 수 있는지 직접 봐 왔다. 이번 만남이 혜광학교 아이들에게도 큰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건음악회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박영주(71) 이건산업 대표이사회장. 피아노가 있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대여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웠을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큰 가정에서 자랐다. 자신이 누렸던 문화적 혜택을 소외계층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내린 해결책이 바로 이건 음악회다.

23년간 연주회를 진행하는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도 많았다. 2004년 '마커스 로버츠 트리오'가 방한했을 때 시각장애인 재즈피아니스트 마커스 로버츠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각장애인 학생을 만나 "네가 겪는 어려움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며 다독여줬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씨 연주회 땐 자폐아동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내는 소동이 벌어졌다.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는 아버지를 향해 청중과 연주자는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공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