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골짜기, 여수 밤바다로 흐르다

폭 21m·길이 150m의 거대한 유리가 산을 타고 정상에서 굽이치며 흘러내린다. 이 '유리 골짜기' 아래, 계곡의 바위를 연상시키는 화강암 계단이 점층적으로 뻗어 있다. 유리와 돌이 펼치는 이중주(二重奏)는 어머니의 품을 닮은 평화로운 여수만과 만나 자연스레 마무리된다.

전남 여수 시전동 망마산 자락에 지난달 들어선 여수문화예술공원 '예울마루'다. 여수시가 제공한 부지에 GS칼텍스가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지어 기증한 건물. 건축이 사회공헌의 대상이 됐다는 점뿐 아니라 지방에서 보기 드문 세계적 스타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화여대 이화캠퍼스센터(ECC)로 한국에 알려진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59)가 디자인했다.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는 계획설계는 도미니크 페로가, 기본·실시설계는 창조건축이 했다.

예울마루를 직접 둘러보니 페로에게 붙여진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라는 수식을 시각적으로 만끽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페로는 "건물을 건축하기보다 풍경을 창조하기를 즐긴다"고 말하며 개별 건물의 조형미보다 자신의 건축물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풍경에 주목해왔다.

ECC에서 언덕 지형을 활용해 계곡을 파듯 거대한 지하 통로를 만들고 양쪽에 건물을 집어넣어 신선한 충격을 줬던 페로. 이번엔 '계곡'과 '지하매립형 건물'이라는 콘셉트를 여수의 산자락으로 고스란히 가져온 듯했다. 산의 경사면을 최대 40m 깊이로 파내고 그 안에 7층 건물(연면적 2만5145㎡)을 끼워넣다시피 만들었다. 산의 경사를 살렸기에 단면도를 보면 높이 40m, 길이 200m의 직각삼각형 형태로 돼 있다. 밖에서 보면 도무지 안을 가늠할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건물의 핵심은 땅을 파내 만들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페로는 산을 파내긴 했지만 훼손된 능선을 건축으로 다시 '회복'시켰다. 공연장, 전시장 등 지하 공간을 완성한 뒤 원래 있던 산의 능선에 맞춰 화강암 계단으로 건물을 마감하고, 그 위에 유리 지붕을 얹어 다시 한 번 능선을 환기시켰다.

'매립'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연파괴'가 아닌 '자연순응형' 건물로 영리하게 포장한 셈이다. "계곡을 따라 바다로 유입하는 듯한 형상을 염두에 뒀다"는 페로는 화강암 계단엔 '스톤 리버(stone river·돌의 강)', 유리지붕엔 '글라스 리버(glass river·유리의 강)'란 이름을 붙였다.

지하공간은 공연·전시장이라는 건물의 쓰임과 맞아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소음 때문에 공연장은 '무창(無窓) 건물'로 짓는데 이 건물은 지하여서 외부 소음을 자연스럽게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경사지형을 활용한 '열미로(熱迷路) 시스템'을 써 에너지 효율도 높였다. 열미로 시스템이란 땅속에 묻히는 건물 좌우의 벽 부분을 이중으로 만들고 그 벽과 벽 사이에 다시 미로를 설치, 내부 공조기에 들어갈 공기를 이 미로에서 미리 데우거나 식히는 기법이다. 창조건축 김영관 상무는 "GS칼텍스가 에너지 기업이라 친환경적인 메시지를 건축에 티 나지 않게 반영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