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해도 괜찮아

저자 자신이 어릴 적 수줍음 많은 책벌레였다. 하버드 로스쿨을 우등 졸업하고 월가 변호사로 활약하는 동안 '외향성'의 가면에 눌려있던 피해의식이 훌륭한 단행본으로 승화했다. 세상 어딘가에서 말 못할 소심함을 감추고 있을 독자들을 격려하는 책. 그런 독자층의 '소심함'을 감안하면 본문 첫 줄의 연도 오역(1995년→1955년)은 작지 않은 실수다.

콰이어트
수전 케인 지음｜김우열 옮김｜알에이치코리아｜480쪽｜1만4000원

도무지 숫기라곤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뭐든 무서워했다. 뱀도, 어둠도, 사람들까지. 방과 후엔 누군가 말을 걸까 두려워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책이 유일한 벗이었다. 커서도 사교는 버거운 숙제였다. "친구들 모임에는 나가고 싶어질 것 같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아."

'위대한 영혼(마하트마)' 간디가 그랬다. 대영제국을 쩔쩔매게 한 '무저항 비폭력 운동'의 모태가 실은 수줍음이었다. "세상엔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참 많다. (… 그 속에서) 수줍음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였다. 그 덕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수줍음의 힘'이 역사를 바꾼 예는 또 있다. 1955년 12월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버스 안의 일이었다. 운전사가 좌석에 앉아 있던 40대 흑인 여성을 향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다그쳤다. "노(No)." 단호한 한 마디는 거대한 시민권 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재봉사 로자 파크스. 2005년 92세로 세상을 떴을 때 사람들은 속삭였다.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지. 하지만 사자처럼 용감했어." 그런데, 어떻게 수줍으면서 동시에 용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저자는 물음으로 책을 연다.

◇외향성의 무대 뒤에 가려진 내향성

일찍이 인성을 내향-외향으로 나눈 것은 심리학자 칼 융이었다. 내향형은 생각과 느낌이라는 내면세계에, 외향형은 사람과 활동이라는 외부세계에 끌린다고 봤다. 요즘은 외향형이 대세다. 어딜 가나 쿨한 남성, 털털한 여성이 인기다. 훌륭해지려면 대담해야 하고 행복해지려면 사교적이어야 한다. 숙고보다 행동, 의심보다 확신, 신중보다 모험이 각광받는다. 은둔을 선호했던 작가도 공개 무대에 서야 하고, 지식인도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대접받는 세상이다. 내면을 중시하던 '인격의 시대'는 가고, 카리스마 혹은 외적 매력이 튀는 '성격의 시대'다. 하지만 요란한 사교문화 뒤에는 힘겨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통계로 보면, 사람들의 3분의 1 내지 절반가량이 내향적이다. 주변에 '외향성'이 많아 보이는 것은 그런 척하기 때문이다.

정작 역사는 '무대 체질'이 아닌 위인들로 빛났다.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모세는 극도로 소심했다. 신이 일을 맡겼을 때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며 딴 사람을 보내라고 했다. 외향적인 형 아론과 짝을 지어서야 길을 나섰다. 그 밖에 만유인력부터 진화론, 상대성이론, PC, 구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수많은 위대한 것들도 조용한 천재들 작품이다.

◇내향-외향성은 우열 아닌 다름

균형을 잃은 외향성 숭배에는 위험이 따른다. 확신에 찬 경영자들의 기업 인수합병(M&A) 경쟁은 불합리한 거래로 귀결되는 수가 많다. TV에서 제한된 정보만으로 자기주장을 자신있게 펼치는 전문가들의 정치·경제 동향 예측을 따져봤더니 무작위로 뽑은 내용보다 못했다.

외향성과 리더십의 상관관계도 미미하다. 팀원들은 내향적 지도자들이 더 개방적, 수용적이라 느낀다. 외향적인 리더는 자기 흔적을 남기는 데 몰두하다가 남들의 좋은 생각을 놓치고, 이들을 수동성에 빠지게 한다.

사실 무대 울렁증은 수십만 년 진화의 결과다. 청중의 시선은 먼 옛날 포식자의 눈빛을 연상시킨다. 외향-내향적 구분은 동물에게도 있다. 초파리부터 유럽박새에 이르기까지 종 구성원의 약 20%는 '관찰하고 기다리는' 부류, 80%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부류다. 둘은 상호보완하며 종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한다.

내향적이라고 다 비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다르게 사회적일 뿐이다. 집단 속의 산만한 잡담보다 소중한 몇몇과의 집중된 대화를 즐긴다. 저마다 외부 자극의 수용 한도가 있고, 내향적인 사람은 과도한 환경을 피할 뿐이다. 외향인은 외적 보상을 추구하고 열광하기 좋아하지만 내향인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위험 신호에 더 민감하다. 월가에서 성적이 좋은 투자자들은 내향인이다.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은 "투자에서 성공은 지능지수와는 관계가 없다. (…)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충동을 억제하는 기질"이라고 했다.

◇때로는 이중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는 왜 '강심장'이 아닌가,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나아가 내향인도 외향적인 사회생활을 훌륭하게 병행할 수 있다. 저자는 하버드대 인기 심리학 강사인 브라이언 리틀의 예를 든다. 그는 청중을 휘어잡는 열강으로 기립 박수를 받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하지만 사는 곳은 캐나다 외딴 숲. 2000여 평 땅에 집을 짓고 아내와 은둔 생활을 즐긴다. 그는 강의가 끝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혼자서 숨을 고른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같은 이중생활. 그는 내향적인 사람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외향인처럼 행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도 자기만의 노하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든 수석보좌관실에 있든 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고 싶었고, 테이블 다리 옆이 내 지정석이었다. 그런 작은 물리적인 거리 덕분에 나는 좀 더 편안하다고 느꼈고…."

결론은 주변의 부산함에 위축되지 말고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 소소한 조언도 많다. '모두와 어울려야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명함만 잔뜩 받아오기보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어라. 12월 31일 저녁에도 혼자인 것이 좋다면 어색하게 여길 게 없다. 강한 주장이나 달변을 좋은 아이디어로 착각하지 마라. 아이의 수줍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