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펜을 들면 다른 나라 작품도 우리 것이 됐다

"처음부터 우리말 소설이었던 것 같은 감각적인 생동감. 게다가 (번역의) 속도와 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

백석(1912~1996) 시의 독창성과 탁월함에 대해서는 그동안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가 이어져 왔지만, 그가 번역한 소설과 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게 사실이다. 탄생 100주년을 하루 앞둔 30일, 서울 공릉동 서울여대에서는 한국비평문학회·대산문화재단·한국작가회의 주최로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이 천재 시인의 다양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자리인데, '번역가 백석'의 재능과 성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특히 이채롭다.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이 있는 북에 남은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하지 못했다. 예술성보다는 사상성을 강조하는 체제와의 불화 속에서, 시인의 차선(次善)은 번역이었다.

고려대 국문과 최동호 교수는 "분단 상황에서 도식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문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번역에 집중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최 교수는 기조강연문 '백석 시의 전체성에 대하여'에서, '번역가 백석'을 수치로 집계했다. 시와 소설을 별도로 구분해야 할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우선 소설은 1940년 토머스 하디의 '테스'를 시작으로 1956년까지 4편의 장편과 단편집 1권, 중편 동화집 1권, 단편 2편 분량을 번역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사실상 시 번역에만 집중했다. 확인된 것만 현대시 197편과 동화시 11편 등 모두 208편.

최 교수는 "평생을 번역에 종사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양의 번역은 쉽지 않다고 해야 할 분량"이라고 했다.

백석 번역의 질적 분석은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의 연구 성과다. 방 교수는 발표문 '백석 번역문학의 높은 수준'에서 1949년과 1950년 2년 동안의 백석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겨우 두 해 동안 백석은 200자 원고지 무려 4618장에 달하는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했다. 전체 8부 중 5부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은 그리고리 멜레호프의 삶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혁명 전후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이었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이념적 구애를 넘어선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었다. 방 교수는 "백석은 이 번역소설에서 순우리말 형용 표현의 다채로움을 한껏 살리고 있다"면서 "토속어의 보고를 이루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시적 창조물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백석이 번역한 '고요한 돈강'의 몇 대목을 인용한다.

"비가 후두둑거렸다. 돈강에서는 벌써 땅거미 들 때 연속되는 자지러진 소리를 내면서 얼음이 우적거리더니" "희퍼리스레한 하늘을 해가 헤엄쳐가고" "별이 아니라 파라스름하면서도 노란 빛깔의 올찬, 알지 못할 열매가 잎사귀 줄기에 달려 있는 것 같이 뵈었다"

방 교수는 백석의 번역문장이 "이국적인 곳의 과거 이야기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우리말 소설이었던 것 같은 감각적인 생동감을 자아낸다"고 했다.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쉽게 나타나게 마련인 생경한 관념적, 개념적 표현 대신에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토착적 어휘들을 찾아 쓰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내일(7월 1일)이 시인이자 번역가 백석의 탄생 100주년이다. 평북 정주 태생인 백석은 북한 정권의 냉대 속에 30년 넘는 세월을 벽촌에서 농사 짓고 양을 치며 살아야 했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어설픈 체제 찬양을 한 적도 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부족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최 교수는 "당성을 전제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북의 문단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백석은 처음부터 서로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