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2012] '새로운 클리셰(상투·관습적 표현)'… 재미와 교훈의 판타지가 왔다

새로워야 신인(新人)이다. 1억원 고료 2012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 수상작인 구한나리(38)의 장편소설 '아홉개의 붓'(문학수첩 출간)은 '새로운 클리셰'로 빼곡하다. 여기서 잠깐. 이건 웬 뚱딴지같은 자가당착인가. 새로운 클리셰라니. 클리셰의 사전적 의미는 상투적·관습적 표현. '새로운'과 '클리셰'는 모순(矛盾)이지 않은가.

하지만 장르소설에서 '새로운 클리셰'는 가능하며 또 반드시 필요한 장치. 올해 판타지문학상 심사위원인 소설가 전민희씨는 "이 장르의 독자들은 연인이 새로운 옷을 차려입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놀이를 하며 새로운 말을 해 주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판타지 소설에서 '새로운 클리셰'가 요구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하나 더. 이상적으로 완성된 장르소설은 처음에는 그 장르 독자들에게 칭송받고, 곧이어 주변 장르들의 독자들에게 전달되며, 대중적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모든 사람에게 퍼져 나가 궁극적으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 당선작 '아홉개의 붓'이 노리는 야망은 바로 그 지점이다.

작품의 시공(時空)은 고대 한국. 세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다. 천인(天人), 상인(常人), 비인(卑人). 문제는 상인의 비인 차별이 심각하다는 것. 갈(秋)은 멸시받는 비인 청년과 평범한 상인 아낙 사이에 태어난 반비반상(半卑半常) 소녀다. 당연히 구박덩어리.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홉 붓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갈은 길을 떠난다. 하늘이 삼인(三人)에게 세 개씩 내렸다는 전설의 아홉 붓. 갈은 이 험난한 여정에서 비인·상인·천인의 동행을 한 명씩 만나고, 서로 다른 물건의 형태로 숨어 있는 붓들을 하나씩 모은다.

'아홉 개의 붓'은 '서유기'나 '아더왕 이야기'처럼 모험과 탐험의 퀘스트 구조를 띠고 있다. 어찌 보면 진부한 클리셰다. 분명 익숙한 구조지만 이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와 배경, 소재와 주제는 산뜻하고 파릇파릇함으로 독자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세계를 창조한 신이 자신의 힘을 아홉 개의 붓에 나누었고, 그것을 모두 모으면 삼인이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착상. 그림과 글씨를 쓰는 붓뿐만 아니라 나무 깎는 칼, 물속의 종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는 유연함. 여기에 고대 한국의 토착언어와 문화가 생생하고, 또 동양 고전에 출전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해박한 인용들이 교양의 미덕까지 더한다.

재미가 우선인 장르소설에서 교훈과 계몽까지 기대하는 건 과욕이겠지만 '아홉 개의 붓'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미덕은 바로 그 대목이기도 하다. 삼인 사이의 차별과 일방적 멸시를 통해 되짚어 보는 현재 우리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심사위원인 인하대 김동식 교수는 "천인, 상인, 비인에게 각각 세 개씩 부여된 붓은 차이에 대한 존중과 공존에 대한 희망을 세계에 배분하는 윤리적 심급(審級)"이라고 했다.

당선자는 수학교육·법학·국문학 등 세 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현재는 부산 경남여고 수학교사다. 대학에서는 야간과 주간 학부를 거치며 다양한 인생들과 삶을 공유했고, 지난 10년간의 교사 생활을 통해서는 학생들 사이의 격차와 차별에 함께 고민해왔다.

판타지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 묘사나 고발이 아니라 별도의 시공을 만들어 은유와 상징으로 에두르는 장르. '아홉 개의 붓'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독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윽박지르는 작가의 호통 때문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성찰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