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묵은 '독기'

"'응' 하고 짧게 대답하는 것조차 어려워요. 매일 대본 읽으면서 골머리를 앓아요. 언제쯤 연기가 편해질까요?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가득할 뿐, 전 아직 멀었어요…."

이 아가씨, 말끝에 진심으로 한숨을 쉰다. 스물아홉 살, 데뷔 9년차, 적지 않은 나이. 오랫동안 단역을 떠돌며 마음고생을 길게 했다는 이 탤런트 이름은 문보령. 최근 KBS 1TV 일일 드라마 '별도 달도 따줄게'에서 야심 때문에 주인공 서진우(조동혁)를 버리고 같은 회사 간부 한민혁(고세원)에게 접근하는 악역 '차경주'를 연기하고 있다. 극중 경주는 전 애인 진우가 한민혁의 동생 한채원(서지혜)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둘의 만남을 교묘하게 방해한다.

시청자들은 이 낯선 배우의 악녀 연기를 보면서 얄미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는 모양이다. 게시판엔 "차경주가 얄미워 죽겠다"는 의견부터 "그래도 경주가 안됐다"는 글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올라온다.

지난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만난 문보령은 지면 광고를 촬영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과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일까. 나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문보령은 데뷔할 때부터 그런 말 참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직 저만의 이미지가 또렷하게 잡히질 않아서 그런가요…. 어떨 땐 '어려보인다', 어떨 땐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인다'고들 하네요(웃음)."

일곱 살 때부터 연기자가 꿈이었다는 그다. "왜 그렇게 배우가 하고 싶었냐"는 질문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TV에 나오는 친구들 보면 부럽고 좋았어요. '나 꼭 저 일 할래' 하고 생각했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고집 센 맏딸.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오랜 반대 끝에 결국 딸이 연기 학원에 다니는 걸 허락했다. 잡지 모델부터 시작했고,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2003년 KBS 2TV 아침 드라마 '나는 이혼하지 않는다'에선 '유나'라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처음엔 이름조차 없었어요. 삼각관계를 만드는 역할이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죠. 그래도 작가님과 감독님이 제 연기를 좋게 봐주셨는지, 분량이 늘어나고 나중엔 이름도 생기더라고요. '시작이 괜찮다' 싶었어요."

행운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작품이 끝나고 5년을 쉬어야 했다. 문보령은 "쉬는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웨딩 화보·뮤직 비디오·잡지 촬영도 숱하게 했고,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했어요. 가끔 TV에서 '연기하느라 바쁘고 피곤하다'고 하소연하는 배우를 보면 질투심이 폭발했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하고…(웃음)."

기회는 2009년 KBS 1TV TV 소설 '청춘 예찬'으로 다시 찾아왔다. 유다인과 쌍둥이 자매인 '순결' 역할로 첫 주연을 맡은 것. 문보령은 "기뻐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고 했다. "왈가닥 선머슴 역할이라 화면에 예쁘게 안 나와서 '다들 절 못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상관없었어요.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죠!"

'청춘 예찬'에 이어 '별도 달도 따줄게'에 출연하는 지금, 문보령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거의 매일 잠을 설친다"고 했다. "잠 못 자도, 밥 못 먹어도, 연기만 더 잘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아직도 모니터를 보면 제 연기는 50점이 될까 말까 해요. 오래 기다린 만큼 잘하고 싶은데, 마음을 비우는 법부터 배워야 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