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음을 연출하는 남자

'심리수퍼바이저 김한규'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간통을 기다리는 남자'(간기남·감독 김형준)의 엔드 크레디트에 올라온 타이틀이다. 한국 영화에 '심리수퍼바이저'가 공식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 당연히 많은 관객이 심리수퍼바이저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다.

지난주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김한규씨를 만났다. 그는 정신과 전문의(박사)로 현직 정신과 병원 원장이다. 김 박사는 심리수퍼바이저에 대해 "영화에 정신건강 의학적 지식이나 심리학적 지식을 적용, 시나리오의 심리적 디테일 묘사나 배우의 내면연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간기남'의 주연배우 박시연과 이광수가 영화 개봉 때 언론 인터뷰에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 상담까지 받았다"고 했는데 그 '의사'가 바로 김 박사였다.

김 박사는 '간기남' 이전에도 여러 번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영화계에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등 지인들이 있어요. 이들을 통해 시나리오나 연출 자문 요청이 오면 돈도 안 받고,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고 시간을 내줬는데 그러니까 다들 너무 당연하게 자문하더군요. 이것도 일인데 좀 속상하긴 했죠. 그래서 '간기남'부터는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고, 다음 작품 '설해'에선 조금이나마 돈도 받게 됐습니다."

김 박사는 '간기남'의 경우 "박시연이 맡은 팜므파탈(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인) '수진' 역이 배우 자신의 캐릭터와 매우 달랐다"고 했다. "그래서 시연씨가 유혹, 살인 등을 일삼는 수진의 이상 행동을 이해하고 연기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죠. 이럴 때 배우가 캐릭터의 기본 심리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게 제 일입니다. 수진이 어릴 때 미혼모 어머니 아래서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고 성폭행을 당한 경험도 있다는 설정을 했어요. 이런 설정에 대해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성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는 수진의 심리를 이해시키는 거죠."

이광수는 극중 '기풍'의 '서번트 증후군'을 연기하기 위해 김 박사를 찾아왔다. 김 박사는 "서번트 증후군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배우도 잘못 표현하기 쉽다. 자폐 성향이 있지만 지능에는 문제가 없고, 오히려 특정 분야에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데도 그냥 '바보'로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기풍'이 어깨를 숙이며 남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거나, 때로 무심한 듯한 얼굴 표정을 짓는 것은 모두 김 박사의 코치에서 나온 것이다.

김 박사는 "비평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독하게 쓸 것 같아 대신에 영화 만드는 데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정신과 전문의의 눈으로 봤을 때,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캐릭터의 심리 묘사나 배우 캐스팅에서 아쉬운 점이 많아요. 가장 괜찮았던 건 짝사랑하는 남성의 심리를 잘 표현한 '건축학 개론'의 승민(엄태웅·이제훈) 캐릭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