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통일되면 만나자"며 北 돌아간 박인숙씨

박인숙씨를 처음 본 건 6년 전 처가(妻家) 모임에서였다. 함경도가 고향인 장인은 박씨를 북에서 온 외사촌 여동생이라고 소개했다. 박씨는 심한 원형탈모 상태였고, 피부도 까칠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씨는 6·25 전쟁 피란길에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려고 사선(死線)을 넘었다. 아버지에게 "왜 우리를 버렸느냐, 그리고 왜 한번 찾지도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55년 만에 다시 본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말 박씨와 함께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음악회를 관람했다. 북에서 온 박씨도 음악적 소양이 별로 없는 필자처럼 클래식 음악을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박씨는 넋을 잃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연주될 때는 거의 무아지경(無我之境)이었다. 박씨는 수십년 만에 베토벤을 다시 들어 봤다며, 공연 안내 팸플릿을 한장 한장 읽으며 즐거워했다.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메뉴판을 뒤적거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박씨의 어릴 적 장래 희망은 음악가였다. 음대에 가고 싶었지만 '공화국을 배반한 아버지'를 둔 것이 걸림돌이었다. 박씨의 아들이 그 꿈을 대신 이뤘다. 박씨 아들은 음악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로 일한다고 했다.

박씨는 활달했고 남쪽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숱도 많아졌고 얼굴빛도 뽀얘졌다. 박씨는 이것저것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모두 북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것 같았다. 박씨는 신문을 구석구석 읽는다고 했다. 어쩌다 만나면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묻곤 했다.

2008년이나 2009년쯤이었을 것이다. 박씨 아들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씨는 북을 떠나면서 자신이 사망한 것처럼 병원기록을 꾸몄다. 자신의 탈북 사실이 알려지면 아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해외출장 갈 일이 생겨 북한 당국이 신원조사를 했다. 박씨의 사망기록이 있는 병원에 박씨의 진료기록이 전혀 없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북한 당국이 박씨 아들을 다그쳤다. 박씨의 탈북 사실이 탄로 났고, 아들은 오지로 추방됐다. 박씨는 "내가 아들 신세를 망쳤다"고 한탄했다. 이따금씩 "내가 돌아가면 아들을 용서해 주지 않을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초 남쪽 친척 집들을 방문한 박씨는 중국에 가서 북한 친지를 만난다고 했다. 그 친지에게 전해주겠다며 유행이 지난 겨울 옷가지들을 챙겼다. 박씨는 "고모가 조카를 도와야 하는데 늘 신세만 진다"고 했다. 조카는 "나중에 통일되면 북한 구경시켜 주면 되잖아요"라고 했다. 박씨는 얼굴이 환해지며 "그래, 그건 내가 잘 할 수 있지"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게 작별 인사였다.

박씨는 중국으로 떠난 지 이틀 후 사촌 오빠에게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제 팔자는 왜 이럴까요. 이 기구한 사연, 누가 알아줄까요." 그리고 다음 날 직접 전화를 걸었다. "오빠, 우리 통일되면 다시 만나요"라고 했다. 사촌 오빠는 "너 미쳤니"라고 했지만 박씨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박씨는 아버지에 앞서 월남했다가 지금은 미국에 사는 친오빠와도 같은 통화를 했다. 뒤늦게 알게 됐지만 올 초 박씨는 사돈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박씨가 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아들도 제자리를 찾게 해주고, 박씨 신변도 보장한다는 북한 당국의 약속을 전한 것이다.

지난 6월 28일, 박씨가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 북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박씨는 탈북자들이 남쪽에서 비참하게 생활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박씨를 사람들은 이중 변절자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애초부터 간첩으로 남파됐던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남쪽의 가족들도 양팔을 번쩍 쳐들고 김정은 장군의 은혜를 찬양하는 박씨 모습이 낯설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 온다. 그러나 박씨와 박씨 아들 가족이 그렇게 해서라도 안전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이 먼저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박씨가 북으로 돌아가게 된 데 무슨 숨겨진 배경이라도 있는 양 추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박씨는 곤경에 처한 아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이 땅의 어머니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박씨가 북을 떠나 남으로 온 것도, 그리고 다시 남을 떠나 북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군사분계선으로 핏줄을 갈라놓은 민족사의 비극 때문이다. 박씨가 한탄했던 박씨의 팔자와 그 기구한 사연을 함께 아파하며, 박씨와 박씨 가족의 안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