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사우디 왕실 물리치료사였던 이모의 삶, 나라도 기록해야 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치마 밑으로 '훅' 하고 바람이 올라왔다. 사우디의 첫 바람은 새벽 3시임에도 후끈했다. 한 남자가 승용차에 타라고 했다. 차는 어두운 밤길을 계속 달렸다. 무섭고 불안해서 영어로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아랍어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질문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모르고 왔나요?" 그의 이 한마디는 쿵, 소리를 내며 내 가슴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2012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아이샤 꾸리(Aisha Coree)'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한 20대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1인칭 소설처럼 써내려 간 독특한 체험기다. 필자 장미란(47)씨는 이모이자 체험의 주인공인 조남표(52)씨를 취재해 글을 썼다.

조씨는 1986년 7월 사우디로 갔다. 그보다 3년 전, 아랍어 무료 강좌가 열린다는 라디오 광고를 듣고 서울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찾아간 게 그곳과 맺은 인연의 시작.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엎드려 기도하며 위로받은 그는 종교도 이슬람으로 바꾸고, '아이샤'란 이름도 새로 얻었다. 이 사원에서 만난 압둘아지즈 투르크스타니(현 일본 주재 사우디 대사)와 맺은 인연으로 사우디 왕실에서 일하게 됐다. 파하드 왕과 조하라 왕비는 그를 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스페인·프랑스에 보내 50여일간 물리치료 요법을 배우게 했다. 그로부터 6년간 그는 왕궁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모는 좀처럼 경험을 털어놓지 않았다. "이모는 왕족이 아니라 고용인이었잖아요. 밤잠 없는 왕이 물리치료를 해달라고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가야 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기 때문에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셨어요." 계속된 설득에 이모는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고 장씨는 "이국적 향취, 정확한 역사 정보, 체험에서 우러나는 메시지를 넣어" 작품을 썼다.

덕택에 독자들은 사우디 왕실의 내면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남성으로는 국왕 한 명과 내시들만 남는 궁궐 풍경, 걸프전이 한창일 때 시녀가 왕의 방독면을 챙기는 걸 잊어 정작 화생방 경보가 발령되자 왕만 방독면을 쓰지 못했던 에피소드 등이다.

심사위원들로부터 "지원작 가운데 문장력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장씨는 2005년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문학상에서 체험수기 부문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20년간 고이 보관한 대학생이 된 두 딸의 육아 일기"를 소재로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