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메카 혜화동, 일요일엔 작은 마닐라로 변신

지난달 24일 오전 11시쯤. 서울 종로구 혜화동로터리 부근 혜화동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성당 앞길 300m에는 순식간에 노점 17개가 들어섰다. 모두 필리핀인들이 차린 것. 돗자리 위에 필리핀 전통 언어인 타갈로그어가 적힌 과자, 필리핀 소설책, 전화카드 등이 놓였고, 그 옆 바구니엔 망고·파파야·코코넛 등 열대 과일이 담겼다.

즉석에서 필리핀 음식을 만들어 주는 '야외 식당'도 3곳 생겼다. 필리핀 쌀국수 '판싯', 보라색을 띠는 필리핀 떡, 부화 직전 계란을 삶은 우리식 곤계란 '발롯', 필리핀식 치즈케이크 '카사바'와 같은 필리핀 전통 음식이 깔렸다. 곳곳에서 "마사랍(맛있다)" "살라맛(감사합니다)"과 같은 타갈로그어가 들렸다.

필리핀인들은 일요일마다 열리는 이 장터를 '리틀 마닐라'로 부른다. 필리핀 현지에서 볼 수 있는 물품과 음식, 고향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인들이 이곳에 장터를 처음 연 것은 지난 1995년. 필리핀인 신부가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보기 시작하자, 서울 전역뿐 아니라 경기도 일대에서 필리핀인들이 혜화동성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혜화동성당에선 알빈 파란타(45) 신부가 미사를 집전한다. 이 미사에만 필리핀인이 평균 1000명 정도 몰린다. 이렇게 모인 필리핀인들은 장터에 모여, 서로 물품을 교환하고,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일요일에만 장사하기 때문에 평소 다른 용도로 쓰던 가게나 트럭을 임차해 쓰기도 한다. 이 때문에 트럭이나 리어카 외관에는 파는 음식이나 물건과 전혀 다른 문구가 적혀 있기도 하다. 필리핀 팥빙수를 팔던 트럭엔 '전기구이 통닭'이란 글자가 보였다.

이들을 위해 비행기 티켓을 판매하는 근처 여행사, 우리은행 혜화동지점과 혜화동우체국이 일요일에 문을 열고 있다.

노점은 대부분 한국으로 시집 온 필리핀 이주여성들의 몫이다. 10년 전 한국에 시집 온 필리핀인 L모(35)씨는 "모든 음식을 필리핀에서 먹던 대로 직접 만들어 오는 것"이라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고국의 맛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