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호롱불은 바람에 꺼지고

퇴근길 학교 복도에서 당직 아저씨를 만났다. 열린 유리창을 닫고, 켜진 전등이 없는지 살피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네. 늦으셨네요, 선생님." 연세 지긋한 아저씨는 늘 말씀도 점잖다. "힘드시지요?" 층계를 내려오며 던진 나의 질문에 그는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많은 말을 쏟아냈다.

"힘든 것은 없어요. 근데 이렇게 순찰을 돌다 보면 가끔 화가 나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통 아낄 줄을 몰라요. 에어컨 틀고 춥다며 긴팔 입고. 혼자 있어도 전등이고 냉방이고 다 켜고 있어요. 사람 없는 복도에 전등이 켜져 있어도 끌 생각을 도통 안 해요. 그러고는 말하면 잔소리라고 싫어하니, 쯧쯧."

어려운 시절을 겪어 온 그로서는 요즘 사람들의 낭비벽이 몹시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평소에 느꼈던 생각들이기도 하다. 어디 다른 사람들만 탓할 것인가? 당장 우리 집에서도 문제가 많다.

"아들! 무슨 샤워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거니, 응? 신령님 나오겠다, 신령님." 샤워실 문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한심한 나머지 펼친 나의 에너지 교육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맞벌이로 시간이 없어 적당히 넘어가곤 했던 탓이다.

곧 여름의 절정이 올 것이다. 많은 사람이 대규모 정전을 걱정하고 있다. 전기요금이 오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절전(節電)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 제공이라든가, 전력 수급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책을 논하고 발전소를 세운들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 한 그 많은 전력 소비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처음 전기를 접하고 설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호롱불 빛은 앉은뱅이 책상 너머로 언제나 가물거렸다. 늦도록 공부하는 오빠를 위해 우리 집에 켜둔 유일한 불빛이 호롱불이었다. 석유 기름이 아까워 언니들과 나는 해만 지면 무조건 잠을 자야 했다. "엄마, 우리도 숙제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해가 있을 때 해야지. 호롱불 꺼질라, 이불 펄럭이지 말고 얼른 자거라."

아래로 조르륵 여동생만 셋인 오빠는 우리 집의 기둥이자 우상이었다. 괜히 시시덕거리며 그의 공부를 방해하거나 쓸데없이 불을 켜고 석유 기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날 호롱불은 달빛처럼 이불 속까지 파고들어 꼼지락 꼼지락 잠을 밀어냈다.

그러던 중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건 아마 1971년 가을이 아닌가 싶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초가지붕 서까래에 전선이 이어지고 애호박 같은 투명한 것이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백열전구'라고 했다. 산골에는 유난히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전구를 처음 켠 그날 나는 밤이 그렇게 환할 수도 있는 것에 놀랐다. 한손으로 몸체를 잡고 스위치를 돌리면 '짤칵' 소리를 내며 켜지던 전등. 키가 닿지 않던 나는 오빠를 졸라 두어 번 스위치를 직접 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기는 아무나 함부로 켜서는 안 되었다. 우리 집에선 오빠나 어른들만 켜야 하는 무언(無言)의 엄한 약속이 있었다.

우리는 그 신기한 물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불이 꺼질까 봐 바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곤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불만 들썩여도 금방 꺼지던 호롱불과는 달리 '호호' 불어봐도, 부채를 부쳐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이상한 물건은 기름을 부을 필요도 없고, 눈에 띄게 닳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기요금이 비싸다며 백열전구 하나 이상은 절대 켜지 못하게 하셨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온통 전기 불빛이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려도 도심의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은 여전하다. 당연히 잠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개발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전기는 어쩌면 인류를 병들게 하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어둡게 사는 데 익숙해질 수는 없을까? 꼭 필요한 곳에만 전기가 흐르게 했으면 좋겠다.

'내가 밤하늘의 별을 본 게 언제였더라?' 가끔은 아이들과 함께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은 높은 빌딩 사이로 뿌옇게 보여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가로등 불빛 아래 사는 식물은 빈 쭉정이 열매만 맺는다고 한다. 인간의 삶도 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에너지를 아끼고 필요없는 전등을 끄는 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본 예의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호롱불만 꺼진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기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전기 역시 대책 없이 펑펑 쓰는 순간 꺼져버릴 수 있다. 그 정전(停電)의 혼란이 사흘만 지속되면 그야말로 지옥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그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호롱불은 바람에 꺼지고, 전깃불은 무심에 꺼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요없이 켜져 있는 전등은 없는지를 사랑의 눈으로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