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자 지붕… 마을회관이 튄다

여전히 남아 있는 남녀유별(男女有別) 문화도 도시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공간을 분리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중동 복지관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 방을 배치하고 가운데 중정을 뒀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유 교수는 "시골 어르신들은 최고의 건축주였다"고 했다. 아무리 파격적인 모형을 들고 가도 의견을 여쭤보면 1차에 무조건 통과됐단다. "대개 건축가들이 만나는 건축주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갑·을(甲乙) 관계가 명확하지요. 까다로운 편이고 고맙다는 얘기도 거의 못 듣습니다. 시골 분들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감동하시더군요. 돈 많은 건축주에게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덤으로 배웠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없어선 안 될 공간은 어디일까. 때론 잔치판이, 때론 사랑방이, 때론 노인정이 되는 곳. 바로 마을회관이다. 적적함 달래려, 난방비 아끼려, 반나절 이상을 마을회관에 머무는 노인도 상당수 있다. 그들에게 마을회관은 '제2의 집'이다. 이렇게 기능적으로 중요한 건물이지만 막상 마을회관의 겉모습을 보면 초라하다. 충격을 주면 곧 무너질 만큼 구조적으로 취약한 건물도 여럿 있다.

조그만 시골 마을회관으로 5년째 건축 실험을 해온 이가 있다. 건축가인 유현준(43) 홍익대 교수. 2008년부터 지금까지 충남 공주 일대에 마을회관 5개를 설계했고, 현재 하나 더 설계 중이다. 2008년 홍익대가 공주시와 디자인 협약을 맺어 마을회관 설계에 참여한 게 계기가 됐다.

"(프로젝트)기회가 별로 없는 젊은 건축가 입장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프로젝트였어요."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유 교수는 "모든 조건이 도시와는 전혀 달라 새로웠고, 마을회관이라는 공간 자체도 특수해 흥미로웠다"고 했다.

공간 구성과 예산상 제약이 많았다. 공사비 1억7500만원으로 30평 남짓한 단층 건물을 지어야 했다. 구조는 할머니방·할아버지방 1개씩, 거실 1개, 남녀 화장실 1개씩, 주방 1개만 들어가는 간단한 형태였다. 이 단순함에 어떻게 건축적 요소를 가미하느냐가 유 교수의 고민이었다. 답은 '독특한 지붕으로 눈에 띄게 하는 것'이었다.

"고층 빌딩이 난무하는 도심에서 단층 건물을 설계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요. 게다가 시골엔 일조권 사선 제한(주위 건물의 일조권을 방해하지 않도록 건물 높이를 제한하는 것)이 없어 아무 제약 없이 지붕에 변화를 줄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도 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같은 건물을 원했다.

공주 '검상동 마을회관'의 지붕은 한옥 처마를 잡아 늘어뜨린 형상이다. 위에서 보면 평행사변형 지붕의 양 꼭짓점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린 것 같다. '마암리 마을회관'의 지붕은 대지 형태를 살려 V자형 경사 지붕으로 만들었다. '중동 마을회관'은 채광을 염두에 둬 경사 지붕으로 설계했고, '추계리 마을회관'은 버섯처럼 생긴 땅 모양을 살려 전체적으로 삼발이 형태로 건물을 짓고 곡선 지붕을 적용했다.

농촌 어르신들의 인식이 도시인들과 사뭇 다른 탓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특히 "자연에 대한 촌로(村老)들과 도시인의 견해차가 흥미로운 지점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삭막한 회색 도시에선 자연을 조금이라도 안으로 들여오는 게 건물 설계의 관건이다. 하지만 그건 '도시인의 눈으로 본 자연'이었다. 이 간극을 절감한 프로젝트가 '석남리 마을회관'이었다. 넓게 펼쳐진 논 옆에 짓는 회관이었다. 도시 사람인 유 교수의 눈에 논은 '봄에 물을 대면 호수 같은 반사경이 되고, 여름이면 풀밭이 되고, 가을엔 노란색 매스(덩어리)가 됐다가 겨울엔 보이드(void·빈 공간)가 되는 환상적인 요소'였다. 논의 풍경을 건물 안에서도 만끽할 수 있게 논 쪽으로 나 있는 방과 거실에 커다란 창을 냈다. 중정을 만들고 잔디를 심어 논이 확장되는 느낌도 줬다. 결과는 실패. 완공 후 유 교수가 갔더니 할머니들이 유리창에 필름지를 붙이고 중정의 잔디는 인공 잔디로 바꿨더란다. "시골 분들에겐 '자연=노동'이란 걸 그때 알았죠. 그분들에겐 자연이 지긋지긋한 존재였던 거죠. 다음부턴 창을 작게 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