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美 최고위직 여성이 직장 떠나는 이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퇴하기로 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이 말은 '직장에서 잘렸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는 어법이다. 미 국방부에서 여성으로 최고위직에 올랐던 미셸 플러노이 정책 담당 차관이 지난해 말 물러날 때도 이런 이유를 댔다. 결국 밀려났나 싶었는데, 국방부 대변인은 이례적으로 그의 사퇴 이유를 '액면가'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 플러노이 차관은 '정말로' 세 자녀를 돌보려고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 카렌 휴즈도 아들을 보살피고자 백악관을 떠났고, 체니 전 부통령의 참모 매리 매털린도 마찬가지였다. 앤 마리 슬로터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도 전 직장인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2년 이상 휴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춘기인 두 아들을 더 이상 떼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슬로터는 국무부에서 일했던 2년 동안 '기러기 가족'으로 살았다. 주중엔 남편이 아이들을 돌봤고 슬로터는 금요일 밤 기차를 타고 뉴저지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큰아들은 더 이상 엄마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고 숙제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슬로터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생각뿐이었다. 기회가 닿는 한 오래 공직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2년 만에 접었다. 그때 엄청난 몰입과 희생을 요구하는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직장인도, 내가 원하는 엄마도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슬로터가 쓰기로 결심했던 그 글이 최근 '애틀랜틱 매거진'에 실렸다. 제목은 '여성들은 왜 아직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이다. 슬로터는 세상은 여성들에게 '일과 가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직업을 갖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이 글을 둘러싼 논란이 퍼져나가면서 일각에선 최고위직에 오른 전문직 여성들에게나 해당하는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란 비판도 나왔다. 젊은 여성들의 사기를 꺾을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역시 공감하는 쪽이 더 많았다. 베트남에서 브라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이 글을 계기로 논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도 지인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한번 읽어보라'고 링크를 보내줬다. '울컥하더라'는 소감을 달아서. 그들의 심정은 워킹맘이 전업맘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는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슬로터는 말한다. 우리가 하루 24시간 미친 듯이 일한다고 '완벽'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탈진'일 뿐이다. 슬로터의 글이 촉발한 논쟁 끝에 나온 각종 아이디어를 요약하자면 "일과 가정 양쪽에서 쏟아지는 요구를 모두 멋지게 해낼 수 있다"고 억지 쓰지 말고, 융통성과 창의성을 도입해보자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COO(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오후 5시 반에 퇴근해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한다. 월드뱅크에 근무하는 한 연구원은 오전 7시에 출근해 점심을 굶고 오후 3시까지 일하다가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일거리를 싸들고 퇴근한다. 아이들이 유아일 때 2년, 10대 때 2년간 휴직했다는 변호사도 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사무실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능력 있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타임 마초 문화'에선 상상하지도 못했던, 생산성도 향상시키고 일하는 사람도 행복한 직장 문화가 탄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