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이익에 눈 감아야… 신뢰 쌓기가 진짜 이득

신입사원 시절 수출부서에서 일하던 필자는 해외 바이어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비싸게 받고, 한 대라도 더 많이 팔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는 세계시장에서 우리 제품의 지명도가 낮고 수출 실적도 부진했기 때문에 우리 제품을 무조건 싸게 사려고만 덤비는 바이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을 받고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수출하는 것은 수출부서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의 로망이었다.

◇"무조건 비싸게, 많이 파는 게 최선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바이어를 만나게 됐다. 그 거래선은 중동국가의 돈 많은 왕족이 경영하는 회사였다. 그 회사는 전자제품 유통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웬만한 브랜드의 전자업체들은 이미 자국에 대리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진출하지 않은 삼성전자를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전자제품 시장을 잘 모르는 것인지, 그 나라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판매권을 받기 위해서인지 그 회사는 제품 가격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필자는 그동안 가격을 후려치려고만 드는 바이어들의 속성을 생각해 일부러 조금 높은 가격을 불렀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생큐!" 했다. 더 많이 사 달라고 요구해도 "생큐!", 재고 상품을 팔 수 있을까 하며 물건을 보여줘도 "생큐!", 그들은 협상도 하지 않고 웬만하면 좋다며 요구사항을 다 받아들였다. 필자는 수출업무 시작 이후 '최단 기간에 최대 수주'의 결과를 갖고 의기양양하게 회사에 상담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잘했다는 칭찬은커녕 상사로부터 호된 질책이 날아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시장도 모르고, 제품도 모르는 문외한으로 대리점 따는 데만 관심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높은 가격에 이렇게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파는 것은 우리 스스로 독배를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바이어는 십중팔구 첫 물량을 가져간 뒤 망해버릴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제품의 경쟁력이 없다며 가격을 깎아달라거나 돈으로 보상해 달라고 요구할 겁니다. 새로운 시장에서 이런 일이 한번 벌어지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든다는 생각은 못해 봤나요?" 상사는 유사한 전례를 설명해주며 다시 상담할 것을 지시했다. 필자는 그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무조건 가격을 높게, 하나라도 더 많이 파는 것만이 수출 업무의 최선은 아니구나." 그날의 배움은 그 후 필자의 직장 생활은 물론 대인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좋은 거래관계를 유지하려면 절차의 공정성을 중시해야

요즘 한일 간의 군사정보 공유 협정과 관련해 절차적 문제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문제뿐 아니라 일반적인 거래의 모든 이해 당사자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일반 거래관계에서 서로 신뢰를 쌓고 오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를 더 갖고 있거나 힘이 더 센 쪽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방을 공정하게 대우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시장 정보도 별로 없으면서 우리의 현지 대리점이 되겠다고 온 눈먼 바이어들을 좀 더 공정하게 대우해줬어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보다 시장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고 대리점 선정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이 거래에서 누가 이익을 더 많이 갖느냐는 이익 분배의 문제인 '분배의 공정성(distributive justice)'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거래 조건에 도달할 것인가의 문제인 '절차의 공정성(procedural justice)'이다. 분배의 공정성이 서로 나눠 가지는 성과물에 대한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절차의 공정성은 프로세스에서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런던 경영대학원의 쿠마르(N. Kumar) 교수는 그의 논문 '제조-유통업체 관계에서 신뢰의 힘(The Power of Trust in Manufacturer-Retailer Relationships)'에서 "분배의 공정성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효력을 발휘하지만, 절차의 공정성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절차의 공정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제조업체 입장에서 분배의 공정성을 확보하려다 보면 거래업체에 대해 자칫 경쟁사보다 높은 마진을 보장하게 되는데 이런 관계를 지속하면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경쟁사에 의해 쉽게 모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반면 절차적으로 공정한 시스템은 구축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 번 구축하면 경쟁사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거래 당사자끼리 정보 공유하며 가격 결정하는 노력이 중요

눈먼 바이어에게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받으면 그 거래는 지속될 수 없다. 반면에 낮은 가격을 받아 거래선에게 경쟁사보다 높은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은 돈을 주고 거래선과의 관계를 사는 것과 다름없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만들려면 주어진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보다는 양 당사자 간에 어떤 과정을 거쳐 최적의 접점을 찾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가격을 결정할 때 먼저 어느 수준의 소비자 가격이면 경쟁력이 있을지를 합의한 다음에 유통회사들의 적정 이익, 비용 구조 등을 감안하여 출고(수출) 가격을 정하는 '세일즈 마이너스(sales minus)방식'은 이런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좋은 예이다.

서로가 모르는 부문의 정보도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바람직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의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정한 가격도 급격한 환경 변화로 시장에서 통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공정한 절차를 거쳐 가격과 거래조건이 결정된 경우라면 어떠한 변화에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수 있다. 절차의 공정성을 지키면서 생긴 상호 신뢰는 훨씬 유연하게 시장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사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