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주연 맡은 악당 조연

탐욕스러운 재벌 2세(드라마 '마이더스'), 왕을 제압하려는 두 얼굴의 선비(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영화 '우아한 세계' '비열한 거리'에서의 조폭. 배우 윤제문(42)에겐 그동안 '악역'이나 '조폭'의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자홍 감독은 샐쭉하게 찢어진 홑꺼풀 눈, 미간의 주름 그리고 차분하고도 차가운 말투의 그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또 있음을 간파했다. 바로 공무원.

윤제문이 영화 데뷔 12년 만에 첫 상업영화 주연을 맡았다. 구 감독이 연출한 '나는 공무원이다'(12일 개봉)에서 서울 한 구청 환경과에 근무하는 10년차 7급 공무원 '한대희'를 연기했다. 악역만 벗어난 게 아니라 착하고 귀여운 캐릭터이기까지 하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윤제문은 말수가 적었고, 말투도 약간 어눌했다. "못된 조연만 맡다가 착한 주연을 연기하려니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씨익 웃었다. "아뇨. 쉬웠어요. 제 원래 모습을 보여주면 되거든요(웃음)."

'한대희'는 '흥분하지 말자'를 모토로 생활하는, 10년간 퇴근 후 TV만 끼고 살아온 '평정심의 대가'이다. 그러나 그의 집 지하실이 인디밴드의 연습실로 바뀌면서 음악과 베이스 기타 때문에 그의 안온한 삶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윤제문은 영화 속에선 더듬더듬 베이스 기타를 배우지만 "사실은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쳤고 졸업 후에는 기타 학원 보조 강사도 했다. 몇 년 전에는 베이스 기타 소리에 반해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의 장영규에게 베이스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 했다. "극 중에서 저를 구박하면서 베이스 기타를 가르치는 민기(배우 성준)는 원래 기타를 전혀 못 치고 저는 잘 치는 편이에요. 저는 못 치는 척, 성준이는 잘 치는 척 연기하는 게 더 힘들었어요."

20대 초중반의 신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번 영화의 중심을 묵직하게 잡아주는 건 주연 윤제문의 몫이다. 그는 "촬영 내내 신이 났다. 현장이 주연인 내 위주로 돌아가니까 진짜 신나게 했다"고 했다. "물론 조연을 맡을 때도 불만은 전혀 없었어요. 부담감이 없으니까. 이번엔 다른 배우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죠."

지금까지 악역만 주로 맡은 데 대해 윤제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인상이 좀 그래서 그런 것 같다"며 "여배우와 함께 나오는 멜로는 물론이고 다양한 역할을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2007년쯤인가 영화에서 한창 조폭 역을 맡았을 때 녹음을 하러 갔는데 기사가 절 보더니 '어, 조폭 전문 배우다'라고 했어요. 그때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들어서 다음부터 (악당은 했어도) 조폭 역은 안 하려고 했죠."

윤제문은 군 제대 후 연극 '칠수와 만수'를 보고서 연기를 시작했고, 1998년 이후 지금까지 극단 골목길 소속으로 '연극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TV와 영화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기 전까지는 장사도 하고 구청에서 한 달에 50만원씩 받고 공공근로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그는 "구청 공공근로를 하면서 공무원들의 모습을 봤던 게 이번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 민원인들이 답답해하든 말든 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게 인상 깊었다"고 했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공무원들이 부럽진 않았을까. "아뇨. 전혀요. 재미없잖아요. 돈이 없으면 사는 게 좀 불편해서 그렇지 연기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전 주·조연 상관없고, 착하고 못된 것도 상관없어요. 재밌으면 무조건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