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남성복, 화려하고 소년 같다

깊은 경제 불황에 빠진 유럽이다. 패션계, 그중에서도 특히 경기에 민감한 남성을 위한 패션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지난달 말부터 약 2주에 걸쳐 패션 본고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에서 내년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이 열렸다.

이번 컬렉션은 시작 전부터 몇 가지 이슈가 있었다. '질 샌더'의 창업 디자이너였던 질 샌더가 자기 브랜드로 8년여 만에 복귀했고 '디올 옴므'에서 딱 달라붙는 스키니룩의 인기를 몰고 왔던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이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변신,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인 것이다. 언론이 아닌 바이어에게만 선보인 에디 슬리먼의 프레젠테이션은 갔다 온 이들의 증언을 통하면 '역시 에디', 즉 굉장한 스키니룩이었다고 한다. 컬렉션 내내 "그의 옷을 내년 봄에 입기 위해서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파리를 떠돌았다.

◇불황 타고 알록달록해진 남성복

내년 봄 남성복 컬렉션의 경향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알록달록한 패턴과 형형색색 컬러다. 경기가 위축되면서 남성복이 화려해졌다. 최근 남성복 트렌드인 '우아한 남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강조한 실크나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도 눈에 많이 띄었다. 긴 바지 기준은 발목을 넘지 않는 범위여야 하며, 반바지 기준은 무릎 위로 올라올 정도로 짧아졌다.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올 법한 소년의 모습이 전체 컬렉션을 주도했다.

연한 핑크색 오간자(얇은 면·레이온 등의 평직물) 소재를 전면에 등장시킨 '지방시', 만화경을 보는 듯한 가지각색 색깔이 체크 패턴과 어우러진 '톰 브라운', 수트에 알록달록한 패턴을 넣은 '에르메네질도 제냐', 이국적인 색채를 흠뻑 담은 '돌체&가바나', 번쩍거리는 금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보인 '랑방', 몬드리안풍의 1960년대 그래픽 요소를 알록달록하게 첨가한 '질 샌더', 무지개색이 다 등장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컬러 수트를 선보인 '구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컬렉션에서 알록달록한 소년의 감성에 기초한 옷을 선보였다.

구두나 가방, 액세서리에서도 이러한 기류는 이어졌다. '토즈'는 오렌지부터 연두색까지 채도가 높은 원색의 로퍼부터 남성 전용 화장품 파우치 가방까지 선보였다. '발리'는 마치 소녀의 정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연 친화적인 중간색의 가방과 구두를 보여줬다.

◇가죽, 울 소재… 두툼해진 봄·여름 옷

또 하나의 특색은 봄·여름 컬렉션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민소매 의상이나 수영복이 많이 사라진 것. 대신 가을, 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가죽 소재 점퍼나 니트, 심지어 울 소재 코트, 악어가죽의 가방과 구두까지 등장했다. 이것 역시 경기 불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얇은 소재의 홑겹 의상보다는 단가가 높은 제품을 겹쳐 입는 방법을 보여줘 판매 수익을 높이는 한편 더위에 구애받지 않는 초상류층으로 타깃을 더 집중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웬만한 냉방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여름에 입기 어려운 스웨이드 소재를 럭셔리 리조트 룩으로 풀어낸 '보테가베네타', 입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보이는 초고가 가죽 상의를 선보이며 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의류 판매에 열을 올리는 '에르메스', 가을에나 입을 법한 풍성한 실루엣의 블루종(허리 부분이 볼록한 블라우스나 점퍼)을 선보인 '발렌티노' 등 시즌리스(seasonless·계절에 상관없는) 옷 입기는 남녀 구분할 것 없는 대세로 떠올랐다.

◇디자인 한류 감지

한국 디자이너들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파리 컬렉션만 10년을 훌쩍 넘긴 우영미는 좀처럼 선보이지 않던 패턴과 컬러를 부각하며 달콤한 보헤미안 스타일을 선보였다. 정욱준의 쇼에는 세계적인 칼럼니스트 수지 맹키스가 지난 쇼에 이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송지오는 품이 넉넉한 바지와 속이 비치는 투명한 소재로 완성된 미니멀 리조트룩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한류의 위상도 느낄 수 있었다. 돌체&가바나가 정우성을 초대했고, 파리 컬렉션에는 빅뱅의 지드래곤이 참석했다. 둘 다 여느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게 수많은 파파라치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