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대화할 때 건방지다는 소리 듣던 박태환, 지금은…"

“선수단장을 맡으면 생고생 다하고도 성적이 나쁘면 욕먹게 돼 있어. 다들 ‘메달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하지만, 막상 성적이 안 좋으면 화살이 내게 날아올 수밖에 없어. 광저우에서 잘하고 온 마당에 욕먹을 일에 새삼 나설 것은 아닌데. 처음에는 ‘다른 분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제.”

이기흥(57)씨는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이어 런던올림픽에도 ‘선수단장’을 맡았다. 대기업 오너도 체육계 스타도 아니고, 그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레미콘업체 대표일 뿐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연달아 ‘선수단장’을 맡은 선례가 있었나?

“없었지. 원래 유진그룹 유경선 회장을 선수단장으로 임명했으나 ‘하이마트 비리 사건’이 터졌잖아. 검찰에 기소돼 갈 수 없는 상황이 됐어. 다시 나를 포함해 삼성·LG 쪽 사람, 이렇게 세 명이 추천됐는데 나보고 또 하라는 거야. 딴 후보자들은 무겁다고 할까, 재벌 분이 나처럼 막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심부름 잘하라고 한 거지.”

―광저우아시안게임 때 성적이 좋아서 그런게 아니고?

“그때도 부담이 많았지. ‘일단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목표였지. 금메달 76개로 종합 2위를 했으니 초과달성을 한 거지. 나야 죽자사자 심부름만 했고.”

충청도 말씨를 툭툭 내던지는 그의 얼굴에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2000년 대한근대5종연맹 부회장으로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카누연맹 회장, 2010년부터는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선수단장이 금메달 많이 따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나?

“선수단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줄 수가 있지. 아침저녁으로 선수들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가령 의전용으로 나갈 차량을 먼저 선수들에게 내줘. 선수들이 ‘많이 신경 써주고 있구나’ 느끼면 우리도 잘해야겠구나 하지 않겠어.”

―선수들에게 격려금 봉투도 전달하고?

“메달 따면 포상금과 격려금, 연금이 나오지만, 메달을 못 따면 꽝이야. 내가 광저우아시안게임 단장을 맡고서 ‘격려금은 모두에게 줘야 한다’며 문광부와 대한체육회에 강력하게 요청했어. 귀국할 때 집에 고량주 한 병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할 것 아니냐며. 그때 처음으로 메달 못 딴 선수에게도 20만원을 주기로 했어. 동메달 격려금은 30만원이었고.”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나?

“4년간 훈련해 몇 초 몇 분 만에 승패가 갈려. 메달을 따든 못 따든 명색이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인데, 이 정도는 대접해줘야 하지 않나. 비행기 비즈니스석도 항상 3개 이상 확보해놓으라고 했어. 부상당한 선수는 비즈니스석으로 귀국할 수 있게 말이지. 또 시합이 끝나도 본인이 원하면 현지에 남아서 다른 경기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했지. 어차피 돈 들여서도 구경 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선수단에서 누가 가장 고생하는 것 같나?

“물리치료사와 식당 아줌마들이지. 5명의 물리치료사가 250명 선수들을 관리하지. 특히 권투·유도·태권도 같은 격투기 종목 선수는 매일 그걸 받아야 돼. 시합이 시작되면 물리치료사들은 종일 옴짝달짝 못해. 딴 사람들은 나가서 관광도 다니는데, 진짜 죽어나지. 나는 현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물리치료사들과 회식하고, 시내 구경을 가도록 해. 선수단 임원들에게는 ‘저녁 먹고 들어올 때 간식거리를 사서 물리치료사들에게 주도록 해라’고 한다. 기분이 그게 아니거든. 이런 걸 신경 써야 팀플레이가 되지.”

―요리사도 다섯 명이 따라가지 않나?

“식당 아줌마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밥만 짓다가 오는 거야.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일부러 선수촌 구경을 시켜줬어. 기념품도 전달하고. 또 중국 노래방에 가서 한잔하라고 격려금을 줬지.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도 ‘날도 더운데 여기에 와서 밥이나 짓고 있다’는 마음보다 ‘우리 선수들에게 잘 먹여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하면 뭐가 달라도 달라지거든. 결국 모든 게 사람의 문제지.”

―선수들은 선수촌에서 지내는데 매끼 식사를 어떻게 하나?

“광저우아시안게임 때는 아파트 하나를 빌려 선수들을 데리고 나와 먹였어. 시합이 있으면 경기장 바깥의 어느 장소로 밥을 날라서 먹이고. 이번에는 대학 기숙사 식당을 빌렸어.”

―시합에 출전하진 못하고 ‘훈련 파트너’로 따라가는 선수가 70명이라는데.

“좋은 경험이 되겠지. 물론 이들도 주역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소외감이 들 테지. 하지만 세상에 꼭 주역만 사는 게 아니다. 조연도 있고 보이지 않는 스태프가 있어야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나.”

―선수들은 대체로 말을 잘 듣는 편인가?

“대표선수가 되기까지는 하루에 수백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인내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자기 콘트롤이 되는 아이들이다. 기본 소양이 돼 있어. 다만 세상 경험이 부족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몰라. 가령 어른을 만나도 뻣뻣하게 서 있곤 해.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잘 가르쳐주면 잘 따라와.”

―요즘 선수들에게 ‘꼰대’ 같은 말을 해도 통하나?

“박태환이나 이용대·장미란 같은 스타에겐 더 엄격하게 하지. ‘실력이 그만큼 좋으니 더 겸손해야 한다. 선배들 잘 모셔라. 인간적 예우를 잘 해야 너희가 더 빛나지 않겠나’고 불러서 말하지. 뭐, 돈 드는 일 아니니까. 메달 땄다고 폼 잡고 다니면 다른 선수들 분위기가 이상해지거든. 한때 취재진 사이에서 ‘태환이가 어떻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착해. 오로지 수영장에서 운동만 해서 예절 교육이나 타인과의 대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나는 만난 적이 없는 박태환 선수가 ‘모범적인 청년’처럼 늘 보였는데.

“사람들과 대화할 때 모자를 쓰고 머리를 수그려. 자기 편한 대로 한 거지. 체육계 어른들은 ‘이 녀석은 건방지게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잖아. 내가 ‘태환아, 어른과 대화할 때면 모자 벗고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으고 쳐다보면서 말씀 드려야지. 그런 게 아니야’고 했어. 그러고 나면 나중에 꼭 고쳐. 지금 태환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잖아.”

1948년 개최된 런던올림픽은 우리가 처음으로 출전한 올림픽이다. 당시 선수단은 67명(임원 17명·선수 50명). 국민 성금으로 여비를 마련해 배·기차·비행기를 갈아타며 9개국을 거쳐 21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12시간 만에 간다. 선수들은 경기장 인근 학교에 야전침대를 놓고 새우잠을 잤다. 정부 수립 직전이었지만 개막식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했다.

―64년 만에 다시 런던올림픽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 우리 선수단 기수는?

“핸드볼의 윤경신 선수지. 서른아홉으로 우리 선수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고 이번까지 올림픽에 다섯 번 출전한다. 또 최장신(203㎝)이고. 깃발을 들려면 나 같은 키로는 어림없어.”

―런던올림픽 목표를 ‘10-10(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으로 세웠다.

“그건 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이 세운 것이고. 내가 보기에는 더 딸 것 같기도 덜 딸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려.”

―아시안게임 때와는 다른가?

“아시안게임은 약간의 오차가 허용되지만 여기는 완벽하게 기량의 100%를 다 해야지, 99.999%로도 안 된다니까. 또 경기력만으로도 안 돼. 그날의 날씨, 음식, 컨디션이 다 작용하지. 그러니까 내가 숨을 못 쉬는 거지. 스트레스가 심해. 단장을 맡고서 절을 여러 군데 다녔어. 지난주에는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왔어.”

―이번에 조계종 중앙신도회 회장도 맡았다.

“내 종교가 그러니,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맡게 된 거고.”

―‘10-10’을 달성하려면 초반 출발이 좋아야지.

“초반에 상승세를 타야지. 정말 스타트가 중요해. 개막식 다음 날인 28일에 ‘수영 400m’의 박태환, 펜싱의 남현희, 양궁 남자단체전, 사격의 진종오가 경기를 해. 이날에 달렸어. 금메달이 터져주면 우리 선수들이 좀 더 숨을 쉴 수 있고.”

―이날 금메달이 터져주지 않으면?

“전체 분위기가 침울해지겠지. 그걸 극복해내려면 굉장히 힘들겠지. 내가 수영연맹회장을 맡고 있잖아. 박태환이 잘해줘야지. 아니면 나와 박태환이가 죽는 거여(웃음).”

―박태환은 200m, 400m만 출전하기로 했다가, 수영연맹에서 1500m를 추가했는데.

“400m과 200m 시합을 하고서 나흘 뒤에 1500m 예선을 하니까, 여유가 있어. 이 종목에서 태환이의 올해 기록이 세계 2위야. 메달권에 들어갈 확률이 있어. 그래서 뛰자고 결론을 내린 거지.”

―박태환 선수는 싫다 소릴 안 했나?

“전혀. 태극마크를 달았으면 개인을 떠나 대한민국의 문제지. 국가가 원하면 해야지. 태환이가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면서 정말 많이 변했어.”

―광저우아시안게임 때 여자 수영에서 금메달을 따서 인기가 있었던 정다래 선수는?

“출전은 하는데 메달은 불투명해.”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유망주는 누구인가?

“남자 도마에 출전하는 양학선이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도는 신기술에 성공하면 체조에서도 첫 금메달이 나올 수도 있어. 여자펜싱의 남현희, 배드민턴의 이용대·정재성조, 여자태권도의 이인종과 황경선, 유도의 김재범·왕기춘, 양궁팀에 걸고 있어. 장미란은 부상이 좀 있다고 해서 걱정이고. 하지만 시합에서는 늘 돌발변수가 있잖아. 복싱에서도 금메달이 나올지 몰라.”

―남자태권도는?

“이란 선수들이 워낙 강세니까. 우리나라 태권도 선수 출신들이 각국의 감독 코치를 맡고 있어. 기량이 평준화돼 체격이 좋은 외국 선수들이 유리해졌어. 4년 전 베이징올림픽에는 금메달 두 개를 예상했다가 4개를 땄지. 우리 선수단은 좋은데 독식해 태권도 종목이 없어질까 걱정했어.”

―금메달을 따면 6000만원, 은메달 3000만원, 동메달 1800만원씩 포상금을 받는다. 또 연금도 타고.

“건국 이래 금메달을 딴 선수는 100명도 안 돼. 메달을 따면 국가 위상을 높이는 거다. 국민을 기쁘게 해주고 하나로 단결시켜주지 않나.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나지. 하지만 한 명이 어느 날 불쑥 나와 금메달을 따는 게 아니잖아. 여럿 선수들이 있는 데서 한 명이 나오는 거지. 그 판을 보호해줘야지. 태극마크를 달았으면 모두가 한국을 빛낸 사람들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은·동을 따도 족보를 못 올려. 하물며 메달을 못 딴 나머지는 뭐야.”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줘야 하나?

“운동하다가 다쳐도 산재처리가 안 돼. 취업이나 사회진출에서 배려가 필요해. 태극마크를 달았던 국가대표 선수들이 철 지난 양복 입고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할 일 없이 왔다갔다 해. 내 눈으로 그런 모습을 많이 봤거든.”

내 눈에는, 선수단장은 잘 뽑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