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없는 나라' 룩셈부르크, 요새 위에 문화를 세우다

현재 이 미술관에선 크로아티아 출신 여성 미술가 산야 이베코비치(63) 개인전을 비롯, 5개의 현대미술 기획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최대한 많은 볼거리로 규모의 약점을 극복한다는 것이 MUDAM의 전략.

◇'부러움'이 낳은 미술관

룩셈부르크는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의 요새'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로부터 지배당했다. 183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지만, 툭하면 기근에 시달렸다. 돌파구가 찾아온 건 20세기 초, 프랑스 국경지대를 따라 매장된 철강 자원을 개발하면서다. 이후 이 나라는 금융 강국, IT 강국으로 거듭 성장했다.

포항 수준의 인구(약 50만명)에 면적은 제주도의 1.4배(2586㎢)에 불과하지만, 작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 12만2272달러(약 1억4000만원)에 이른 나라, 유럽의 강소국(强小國) 룩셈부르크다. 그러나 이 나라는 유럽 내에선 "철학도, 문화도 없는 나라"(프랑스 철학자 알랭 핑켈크로트)라는 비아냥까지 받았던 문화 불모지였다.

이 룩셈부르크가 '문화 강소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상징이 지난 2006년 완공된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MUDAM(Mus�[e d'Art Modern Grand-Duc Jean). 설계는 파리 루브르미술관 유리 피라미드를 만든 중국계 건축가 I.M. 페이에게 맡겼다. 페이는 중세의 돌로 쌓은 요새(fortress)를 살리면서 이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재료인 철과 유리를 많이 쓰는 '글라스 앤 스틸' 공법으로 기하학적 외관을 구현했다. 건축비는 약 1억달러(약 1100억원). 쇠락하던 스페인 북부 산업도시 빌바오가 프랭크 게리와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해 세운 '구겐하임 빌바오'를 통해 세계적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17세기 요새와 현대적 건물의 결합

14일 찾은 이 미술관은 첫눈에도 '작다'는 느낌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은 면적 4500㎡. 소장품도 500여점으로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6800여점)과 비교해도 한참 처진다. 300년이 넘은 요새를 '리모델링'해 만든 미술관이지만, 정작 고전이나 모던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미술관은 '컨템퍼러리(동시대) 아트' 외에는 예산을 지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장품은 앤디 워홀, 브루스 나우만, 줄리앙 슈나벨을 비롯해 벨기에 설치작가 빔 델보이, 프랑스 개념미술가 다니엘 뷰렌, 중국 차이궈창 등 1950년대 이후 본격 활동한 작가들. 폐허가 된 17세기 요새 위에 지어진 흰색 건물은 무너진 성벽, 부서진 망루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문화'가 없었다. '문화'에 대한 욕구도 크지 않았다. 1989년 당시 자크 상테르 총리가 현대미술관 MUDAM 건립을 제안했을 땐, "우리에게 굳이 현대미술관이 있어야 하나" "유적지에 현대미술관이 어울리겠나" 등 반대도 거셌다. MUDAM의 언론 책임자 발레리오 달리몬테(39)는 "당시 I.M. 페이의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건립이 연일 화제였다. 총리는 그게 부러웠고, 우리도 그 못지않은 미술관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이를 '루브르 효과'라 불렀다"고 했다. 제안에서 완성까지 17년이 걸린 것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해온 시간이기도 했다.

◇'작은 빌바오'?…아직 미지수

개관 후 6년, 아직 MUDAM의 성공을 말하기는 이르다. 14일 미술관에서 만난 호주 관람객 제시카 메아르(28)씨는 "규모가 작아 오히려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해가며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건축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미술관"이라고 했다. 엔리코 룽기(50) MUDAM 관장은 "룩셈부르크가 파리나 런던이 아니듯, MUDAM이 퐁피두나 테이트 같을 순 없다. 젊고 국제적인 작가들 작품을 중점적으로 컬렉션해, '작지만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키워갈 것"이라고 했다. 내년엔 한국 설치작가 이불(48) 개인전도 열 계획이다. 하지만 한 해 평균 관람객 6만명은 룩셈부르크 국민 50만, 룩셈부르크 시민 10만에 비해서는 적지 않은 숫자. 세계적 미술관으로 도약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 즐비한 유럽 한복판에서 후발주자로서 MUDAM이 '작은 구겐하임 빌바오'로 성공할지가 세계 미술계의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