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작가 김차섭·김명희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 글·정지현 시니어조선 편집장
  • 사진·이승무(아이잔상 스튜디오)

입력 : 2012.07.25 14:49

INTERVIEW | 부부작가 김차섭·김명희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시인 반칠환의 책 제목에서 차용)

나이가 든다는 것은 슬픈 모멘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병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나 이런 나이듦이 서글프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니까요.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한 공간에서 나란히 개인전을 선보인 김차섭, 김명희 작가. 뉴욕에서의 생활을 접고 강원도 폐교에 둥지를 틀어 국내에서 작업을 한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평생의 동반자로서 같은 길을,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무는 쉽게 파트너를 갈아치우지 않는다.
평생 한 자리에서 여름과 겨울, 폭풍과 장마를 견딘다.
서로를 다 가려주려 욕심내지 않고 각자 온몸으로 비를 맞으나,
평생 동행하는 나무에게서 배운다.
내 옆에 잠든 게 보드라운 은사시가 아니라
따가운 탱자나무일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당신’하고 호명해 보라.
내게 가까이 있는 신은 언제나 ‘당신’이니까.
-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서

김차섭, 김명희 씨의 관계를 이 글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들은 결혼 35년차 부부다. 그리고 미술작가이다. 사실, 창조적인 작업인 ‘예술’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작업에 빠져들다 보면 가족을 두루 배려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직장인처럼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기에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일 수 없다. 이렇다보니 예술가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면 둘 중 한 사람은 중도에 작업을 접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각자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작업을 지속해왔고, 지난 7월에는 갤러리 현대에서 함께 전시를 열었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2001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같은 건물 1,2층에서 각각 전시회를 마련한 적은 있어요. 그러나 서울에서 동시에 발표회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라고 말하는 김명희 씨의 모습에서 작은 설레임이 느껴진다.

▲ 사진 위쪽 작품 , Acrylic and Chinese ink on canvas, 2012, 사진 아래쪽 작품 <분수놀이>, Oil pastel onchalkboard, 2011.
별하나에 사랑을 약속하다

잦은 우연은 필연이라던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였지만 9살이나 차이가 났기에 같은 수업을 들으며 캠퍼스에서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명희 씨가 1학년으로 입학했을 때, 김차섭 씨는 이미 졸업을 하고 작가로서 활동 중이였다. 그런데, 김명희 씨가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던 ‘씨네클럽’에서 단편 영화 제작을 하는데 촬영 장소로 작가의 작업실이 필요했고, 그때 알게 된 것이 김차섭씨다. 이후, 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고 미술 교사 발령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 재직 중인 김차섭 씨를 다시 만났다. 여고생들에게 ‘미술 선생님’은 그야말로 로망 그자체. 당시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같은 과목 동료 교사로서 가까이 지냈음은 물론이다. 멋진 남자 미술 선생님, 그 옆에 예쁜 여자 미술 선생님이라니! 여고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샘을 받았을까.

그렇지만 두 번째 만남도 우연에 그쳤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서 꾸준히 개인 작업을 하던 김차섭 씨는 록펠러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1975년 뉴욕의 프랫인스티튜트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1년 뒤, 김명희 씨 또한 프랫으로 유학을 가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듬해 결혼했다. 뉴욕 시청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10명 남짓한 하객 앞에서 은반지 교환하고 결혼 증명서에 서명을 하고 나니 5분 만에 예식이 끝나더란다.

“학교를 마치고 나니 지원금도 끊기고, 수중에 돈도 없을 때였습니다. 기숙사에서도 나가야 할 상황이니 앞이 막막했죠. 지하철을 타고 종점인 코니아일랜드에 갔습니다. 그곳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마침 푸른 하늘에 별이 하나 반짝 뜨길래, 저것 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더라고요. 그리고 말없이 지하철 타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김차섭 씨의 사랑 고백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굳이 말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뉴욕 근교 바다에 가서 함께 별을 보고 돌아오면서 이미 두 사람은 앞으로 긴긴 시간을 동행하면서 서로의 이웃 나무가 되어주리라 약속한 것이다.

부부란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동반자다

치열한 경쟁의 도시 뉴욕에서 이들은 치열하게 살았다. 그 결과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김차섭 씨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체이스맨해튼 뱅크 등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던 1989년, 이들은 20년 가까운 뉴욕 생활을 접고 1990년 춘천 부근 폐교에 둥지를 틀었다. 언제고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성공한 작가라는 허울 속에 파묻히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이었다. 뜻밖에 이들의 폐교 행은 국내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전까지 빈 채로 방치되었던 시골학교에 작가들이 입주해서 작업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폐교 문화의 시대’를 연 것이다.

강원도에 정착한 지 20년 남짓. 변함없이 이들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 다만, 강원도의 한파를 피해 추운 겨울에는 뉴욕 소호에 있는 집으로 가고, 이듬해 봄이 되면 어김없이 강원도로 온다. 서울에서 7시간이나 걸리던 작업실을 이제는 1시간이면 갈 수 있을만큼 편리해졌다. 강원도의 깊고 외딴 오지에 길이 나는데 걸린 시간에 비례해 이들 또한 연륜이 깊어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슬픈 모멘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병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4년 전, 김차섭 작가는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 후 현재 회복 단계이다).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이듦이 서글프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니까요.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늘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던 김차섭 씨가 덜컥 위암에 걸려 간호를 하는 동안 김명희 씨에게 든 생각은 단 두 개뿐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회복과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 그 바람이 이루어져 여전히 함께 작업실을 나눠 쓰며 그림을 그리고 있고, 부부전까지 열었다. 어떻게 열정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들은 말한다. “열정은 아직도 이루어야 할 것이 많은 때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옅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신 그 자리에 성숙함이 들어섭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김차섭 작가는 인간 문명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에 대한 탐구와 서구 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다. <파이의 윈도우>(2012)나 <아날렘마>(2007)가 이 두 축을 잘 설명한다. <파이의 윈도우>는 무한수와 같이 수학적 도구로는 절대 측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를 돌덩이로 표현했다.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물에 침식돼 동글동글해진 자갈이 캔버스 한가득이다. <아날렘마>는 세계지도를 거꾸로 매달아 동남아 문명의 가치를 띄웠다. 1993년부터 시작한 역(逆)지도화 작업의 하나다.

김명희 작가는 1990년부터 강원도 춘천 폐교에 둥지를 틀며 버려진 칠판 위에 오일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세계를 떠돌아다닌 유년기, 1976년 김차섭 작가와 결혼하여 미국에 살게 된 삶을 작품에 반영하여 ‘뿌리뽑힘’이라는 주제로 지속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2005년을 기점으로 유목적 생활이 오히려 삶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긴장감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겼고 그러한 작가 세계관의 변화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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