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ALK] '투자 책임○○○'… 한국 영화에만 있는 특별한 이름

영화가 시작될 때 감독과 배우·작가·제작사·제작자 등의 이름을 소개하는 자막을 '오프닝 크레디트'라고 한다. 그런데 외국 영화 오프닝 크레디트엔 없는데 한국 영화의 그것엔 들어가는 것이 있다. 바로 CJ E&M이나 롯데엔터테인먼트와 같은 투자·배급사의 임직원 이름이다. 이들의 사내(社內) 직급을 그대로 쓰는 것은 아니고 통상 '투자 책임 ○○○' '투자 총괄 ○○○' 식으로 표기된다. 왜 이럴까.

20여년 경력의 한 영화 제작자는 "10여년 전 영화를 만들 때는 투자·배급사와 투자사 이름 정도만 들어갔는데 2000년대 중반부터 투자·배급사 임직원 이름을 넣는 것이 관행처럼 됐다. 이 시기는 대기업 계열사인 투자·배급사가 영화계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된 때이기도 하다"고 했다. 한 중견 제작사 대표는 "투자·배급사들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오프닝 크레디트에 대해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오프닝 크레디트에 관한 자기들의 '권한' 자체를 계약서에 명시하기도 한다"고 했다. "투자·배급사에서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이젠 미리 알아서 넣어주는 제작사도 있다"고도 했다.

한 영화 제작자는 "돈을 대줬다는 이유로 자기네 회사 임직원 이름을 쭉 늘어놓고 정작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이름은 구석에 처박아두는 건 창작자를 무시한, 기괴한 현상"이라고 했다. 다른 실무 관계자는 "유니버설·20세기폭스와 같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엔 오프닝 크레디트에 임직원 이름을 넣을 수 없다는 규정까지 있다고 한다. 제작사와 감독·배우·작가 등 영화를 직접 만드는 사람들 이름만 오프닝 크레디트에 들어가는 것이 그곳의 오랜 관습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투자·배급사 측은 "우리 힘이 커지면서 생긴 변화는 맞지만 일방적인 요구는 아니다"라고 했다. 한 투자·배급사 임원은 "예전에는 투자·배급사와 제작사 역할이 엄격히 분리됐지만 최근엔 양측이 공동 제작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투자·배급·마케팅 등도 영화를 만드는 한 과정에 속하기 때문에 투자·배급사 임직원 이름을 넣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