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가격 50~60% 떨어져도… 은행들, 대출(상가 대출) 6조 늘려

서울 구로구에 있는 T복합쇼핑몰 9층에 있는 13㎡(4평) 넓이의 휴대전화 판매 매장. 농협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7월 감정가 1억5000만원인 이 상가를 담보로 1억1000만원을 빌려 줬다. 수도권 주택에 대해선 담보대출비율(LTV)이 50%가 적용되는데, 상가엔 이런 규제가 없어 담보의 73%까지 빌려준 셈이다. 이 상가의 대출금은 2010년부터 연체되기 시작했고, 상가는 2년째 법원 경매 목록에 걸려 있다. 지난 24일 10번째 경매가 진행됐지만 사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다음 달 이 상가는 감정가의 10분의 1 가격인 1600만원에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 가격에도 새 주인을 찾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잠재적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LTV 70%를 넘게 대출해 줬던 농협은 고스란히 1억원을 떼이게 된 셈이다.

상가 대출 연체율에 비상등이 커졌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퇴직자들이 도심 곳곳에 들어선 상가에 가게를 내고 인생 2막을 꿈꾸고 있지만, 내수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이자도 제때 못 내는 곳이 늘고 있다. 3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0.9%였던 상업용 부동산 담보 대출 연체율이 5월 말엔 1.4%로 껑충 뛰었다. 경기 침체로 상업용 대출의 35%를 차지하는 상가 담보 대출의 부실이 늘었기 때문이다. 작년 1월부터 지난 5월까지 증가한 상업용 대출 26조원 가운데 거의 절반(12조8000억원)이 자영업자 대출이고, 이 가운데 약 절반인 6조원이 상가 대출이다.

30일 국토해양부가 전국 2000곳 상가를 표본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공실률이 9.3%로 지난해 말(7.8%)보다 1.5%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 상가 건물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의 6월 말 공실률은 14.7%로 집계됐다. 상가 7곳 중 1곳이 비어 있는 셈이다.

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 하유정 연구원은 "대출을 갚지 못해 경매에까지 나오는 상가 중 상권력이 좋은 지역에서 나오는 상가는 전체의 10%도 안 된다"며 "경매에 나오는 상가는 좋지 않은 상권 탓에 평균 감정가 대비 50~60% 선에 낙찰되기 때문에 채권자 입장에선 '깡통 상가'"라고 말했다.

상업용 대출에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지만,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기업 등 6대 시중 은행은 최근까지도 상업용 부동산 대출을 크게 늘렸다. 2009년엔 관련 대출이 전년 대비 1.2% 증가하는 데 그쳤는데, 올 들어 5월까지 전년보다 4.9%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주택담보대출 증가율(0.9%)의 5배가 넘는다. 이 은행들의 5월 말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 규모는 196조8000억원으로 주택담보대출 223조8000억원에 육박했다. 정부의 가계대출 증가 억제책에 따라 기업대출로 분류되는 자영업자 대출에 눈을 돌린 시중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가계대출은 하지 말라고 하고 기업대출은 위험하다고 하니, 은행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담보 가치를 바탕으로 자영업자에게 많은 돈을 빌려 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시중 은행들은 뒤늦게 상업용 대출 연체율 대책 마련에 나섰다. A은행은 이달 초 상업용 부동산의 내부 담보인정비율을 떨어뜨렸다. 또 상가·상업용 오피스텔 등에 대해선 일선 지점장의 재량으로 담보인정비율을 높여주던 관행도 없애기로 했다. A은행 관계자는 "실수요자들의 채무상환 의지가 상대적으로 높은 주택담보대출 연체율보다는 경기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가담보대출의 연체율 급증을 더 큰 위험 신호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채권자인 은행이 몸을 사릴수록 자영업자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김영일 KDI 연구원은 "자산이 없어 빚을 갚을 수 없는 자영업자의 경우엔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구제를 해줘야 하고, 유동성 문제로 흑자도산의 위험에 처할 자영업자의 경우엔 정부가 신용을 보증해 주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