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나쁜데 물가 상승률도 뚝… 한국, 일본식 디플레(경기 침체 속의 물가 하락) 그림자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저성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물가가 급락해 자칫 '일본형 불황'을 닮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통계청은 1일 지난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1.5%를 기록, 12년 만에 최저치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보통 물가 상승 폭이 떨어지면 가계 생활비 부담이 적어지지만, 이번에는 마냥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경기가 나빠지면서 물가가 급속하게 내려가는 것이므로 안 좋은 조짐"이라고 했다.

일본은 1990년대 들어 3%대이던 물가 상승률이 1%대로 떨어진 뒤, 결국 마이너스로 돌아서 이후 20년 가까이 디플레 함정에 빠진 바 있다.

정부 관계자는 "1%대 물가 상승률은 글로벌 경기 둔화로 수요가 꺾이고 유가가 떨어진 영향"이라며 "가능성은 낮지만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디플레 위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물가 담당 기관인 한국은행은 앞으로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13일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3.2%에서 2.7%로 내렸다. 치솟는 국제 곡물값에 따른 물가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경기 부진에 따른 국내외 수요 감소 요인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7월 물가 상승률이 전망치인 2% 초반보다 훨씬 낮은 1.5%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 공포가 현실감을 갖는 이유는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경제부가 이날 발표한 7월 수출 실적은 446억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8.8% 감소했다. 이는 미국발 경제 위기 직후였던 지난 2009년 9월(-9.4%)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세다. 우리나라 수출은 올 들어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연속 마이너스를 나타내다 6월 소폭 상승했으나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선박 수출액은 반 토막 났고, 철강·석유화학 등 중간재 수출도 20%가량 하락했다.

지경부 안병화 수출입 과장은 "주요국 상황과 수출 기업의 체감 경기 등을 감안할 때, 3분기 이후에도 수출의 급격한 개선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성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출이 부진하면서 우리나라는 올해 2%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4%인데 이를 한참 밑도는 저성장이 이어져 디플레이션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도 국내 디플레이션 위험을 높이는 요소로 지적된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산 가격이 떨어져 소비가 위축되는 이른바 대차대조표 조정에 따른 디플레 압력도 한국에서 일본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국내 소비 지표는 자산 가격 하락과 과도한 부채에 따른 위축 조짐을 보이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6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소매 판매액은 전달보다 0.5% 감소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가계 부채가 910조원에 달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경기 침체 조짐이 급속도로 나타나자 소비 심리까지 위축되고 있다"며 "당분간 소비가 살아나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소비가 위축되면, 이 역시 물가 상승률을 낮추는 압력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