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스펀지 등 첨단물질 만든 초분자화학 거두

탁월한 신경 안정제이자 입덧 완화제였던 '탈리도마이드'는 1960년대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라는 비극을 남겼다. 이 약을 복용한 임신부들이 잇따라 기형아를 낳았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약의 분자구조는 거울에 비친 상(像)처럼 좌우 대칭형의 두 가지가 있었다. 즉 화학 성분은 똑같은데 왼손이 거울에 비치면 오른손이 되는 것처럼 분자구조를 이루는 원자들의 위치가 달라 한쪽은 약이 되고 다른 쪽은 독이 됐던 것이다. 당시엔 이 둘을 구별해낼 기술이 없어 약을 만들면서 독까지 함께 넣은 결과를 낳았다.

제약·식품산업계로선 생존이 걸린 골칫거리의 해법을 제시한 과학자 중 한 명이 포스텍 김기문 교수(첨단재료과학부)다. 김 교수는 금속과 탄소 분자 등으로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나 있는 일종의 필터를 만들어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 중 쓸모있는 부분만 분리·합성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2000년 네이처(Nature)에 실린 이 논문은 한국인이 주(主)저자인 논문 중 역대 최고인 2000회 이상의 인용 빈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김 교수 논문을 그만큼 많이 참조한다는 뜻이다. 과학저널 네이처가 선정한 지난 반세기(1950~2000) 가장 탁월한 화학 논문 35편에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 나선구조' 논문과 나란히 선정되기도 했다.

김 교수가 만든 필터는 벽돌을 쌓아 건물을 만들듯 작은 분자들이 모여 거대한 구조를 이룬 형태다. 벽돌과 건물의 기능이 전혀 다르듯 거대 구조가 되면 구성 분자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다. 이런 구조를 만드는 것이 바로 초(超)분자화학이다. 김 교수는 이 분야에서 최선두를 지켜온 화학자다.

초분자화학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미래 기술로 꼽힌다. 그는 초분자화학으로 수소 저장용 나노 스펀지도 개발했다. 현재의 수소 저장 기술은 60L짜리 연료탱크에 500g의 압축수소를 담을 수 있다. 한 번에 50㎞를 달릴 수 있는 용량이다. 김 교수가 2004년 내놓은 나노 스펀지는 이보다 몇배 더 많은 수소를 저장할 수 있다.

또 다른 성과는 이른바 '분자(分子)호박'. 탄소·수소·질소 등이 연결된 물질이다. 호박의 위아래를 잘라내고 속을 파낸 듯한 분자구조를 이루고 있다. 호박의 학명(쿠커비타세)을 따 '쿠커비투릴'이라고 불린다. 1905년 발견된 이래 누구도 그 쓸모를 찾지 못하던 것에 김 교수가 처음으로 응용의 길을 열어줬다.

김 교수는 1996년부터 분자호박으로 암세포 등 원하는 부위에만 작용하는 나노 캡슐, 몸속 세포에서 특정한 성분만을 찾아내는 바이오센서, 이산화탄소 흡착물질 등을 잇따라 만들었다. 지난 10여년간 쉼 없이 쏟아진 김 교수의 연구 성과 덕분에 분자호박은 쓰임새가 무궁무진한 팔방미인으로 태어났다.

이런 성과 덕분에 김 교수는 한국과학상(2001년), 호암상(2006년)을 수상했으며, 톰슨로이터 선정 세계 100대 화학자(2011년)에 선정됐다. 지난해엔 한국 과학자로선 유일하게 미국 UC버클리가 시상하는 뮤터티상을 받았다. 세계적 화학자인 얼 뮤터티 교수를 기리는 이 상은 헨리 타우베(1983년 노벨화학상), 리처드 슈락(2005년 노벨화학상) 등 세계적 석학들이 수상했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에 선정됐다. 그의 목표는 저절로 연결돼 원하는 기능을 갖는 거대 구조를 만드는 '스마트(smart)' 분자. 촉매, 수소저장, 바이오센서, 반도체 등에서 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물질이다. 촉매 한 분야만 해도 한 해 시장 규모가 200억달러(약 23조원)에 이르니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초반 분자호박 연구에 진척이 없자 교수의 자존심을 접고 미국의 저명한 화학 교수 밑에 들어가 대학원생처럼 하루 12시간씩 연구에 매달리기도 했다. 김 교수는 "우리 세대는 선진국에서 설움을 당하면서 신기술을 하나하나 배워야 했지만, 미래 세대는 그렇지 않게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초분자화학(超分子化學·sup ramolecular chemistry)

작은 분자를 블록 쌓듯이 연결해 새로운 기능의 거대 분자를 만드는 화학 분야. 의학·에너지·환경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