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5] 영남사림으로 유배지 순창서 생 마감해

1545년 늦가을 을사사화는 기막힌 공작이며 어지러운 음모였다. 문정왕후가 최종 재가하였지만, 한편에서 이기(李�Q,1476∼1552)가 적극 추동하였다. 뇌물죄로 처벌받은 장리(贓吏)의 사위였던 탓에 인사 및 학문·사법·언론을 담당하는 청현직(淸顯職)을 맡지 못하여 노여움이 깊었다. 재상은 바랄 수조차 없었다."경국대전"이후 반포된 법령이 그랬다. 그러나 남다른 기량과 재간으로 세월을 버텼고 자신을 감추며 세상을 흘겼다. 그러다가 1540년 누이의 외손자가 문정왕후 소생의 공주와 혼인한 덕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때부터 문정왕후 및 소윤세력의 버팀목을 자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기는 인종의 대신을 역모로 몰아가며, 한때 자신의 진로를 가로막았던 신료에게 보복하였다. 가까운 친척도 가차 없었다. 고종사촌 유인숙(柳仁淑), 친조카 이원록(李元祿), 오촌생질 구수담(具壽聃) 등을 죽이고 유배 보낸 것이다. 무서운 '노호본색(老虎本色)'이었다.

심지어 경상도 순변사로 나갔을 때, 다만 읍례할 뿐 한마디도 살갑게 건네지 않았던 종사관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1528년 문과를 통과한 경상도 선산 사람 김진종(金振宗,1496∼1557)이었다. 현량과가 실시될 때 '뜻이 곧고 굳센 선비'로 천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김진종은 파직으로 그치는 듯싶었다. 한동안 고향마을 문암(文巖)에서 자신을 추슬렀다. 그런데 정순붕이 기별하였다. "농토와 노비를 바치면 유배는 면할 수 있겠다." 한때 기묘사림과 가까웠지만 어느새 이기와 결탁하며 시커멓게 변해버린 처고모부였다. 그러나 거절, 전라도 태인을 거쳐 순창으로 쫓겨왔다. 한동안 두문불출, 그런데 홍문관에서 같이 봉직한 김인후가 방문하였다. 옥과현감을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김인후는 김진종을 문암(門巖)으로 존중하였다. 전에는 문암에 살았지만 지금은 문을 닫고 바위샘에서도 초연하다는 '두문암혈(杜門巖穴)'에 견주었음에 틀림없다. 조심스럽게 위안하였다. "병든 제가 능히 마시겠으니 선생은 거문고를 아끼지 마소. 한세상 아득하게 어울렸던 동지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두 사람은 귀래정을 자주 찾았다. 어느덧 김진종도 편안한 듯, "휘파람 불며 동녘 언덕 오르니, 대숲 사이에 백년 묵은 정자일세라. 우짖는 새가 무슨 뜻이 있는 듯, 나그네의 흥취를 돋우네."

김진종은 간혹 강변 낚시로 소일하였다. 언젠가 붕어를 보냈는데, 김인후의 부친이 드시고 쾌차하였다는 전갈을 보내와 반가웠다. "은비늘 발라내고 회를 치니 싱싱하여, 어버이 진짓상에 올렸더니 씻은 듯 나으셨지요. 이내 달려가 감사드리지 못하는 결례를 저질렀는데, 여태껏 비가 음산하게 뿌려대니 더더욱 마음을 졸인답니다."

1551년 봄 고향의 부인이 찾아오면서 다소 편안하였다. 그러나 정녕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섣달 겨울 붉은 명정이 솔바람에 쓰리게 휘감길 때, 김인후가 장편 만사에 아릿한 소망을 담았다. "삼십 년 해로한 금슬이라, 영영 이별 서러워라. 열두 해 마음만 아팠나니, 지하에서 인연을 이어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