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마음으로 안아주면 진심이 통하지요"

김포 평야의 푸름이 병실 창 밖으로 펼쳐졌다. 지난달 27일 만난 경기도 김포시 여성단체협의회장 김치희(67·김포시 통진읍)씨는 병원 침대 위에서 붕대 감은 오른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손에 든) 짐만 놔 버렸으면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났을 텐데 잃어버리면 안 되는 줄 알고 끝까지 잡고 있다가…." 김씨는 지난 6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동거 부부의 합동결혼식을 준비하다가 발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올해의 경기도 여성상 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씨는 지난달 4일 열린 시상식 때 휠체어에 앉아 상을 받아야 했다. 주변에선 "너무 바쁘게 사니까 좀 쉬라고 다치게 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녀는 '김포시 봉사의 대모'로 불린다.

◇봉사가 일상생활이 되다

"따로 봉사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이 된 것 같습니다. 봉사라는 게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뭔가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회원들과 함께 노인이나 아이들 찾아 다니면서 봉사랍시고 하고 장학금을 주고 했지만, 매달 10만원씩 회비 내고 남몰래 봉사하는 회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사실은 그분들이 훌륭한 분들이에요."

김씨가 김포에 산 지는 올해로 45년째. 갓 결혼해서 신혼 때 남편이 봉제공장을 차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70년대 봉제공장에는 시골서 상경한 '여공'들이 많았다. 명절이면 고향에 내려갈 차편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들을 김씨 부부가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라도, 강원도 그렇게 집집마다 데려다 주면 그 가족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부부도 덩달아 행복했다.

김씨가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4년 장릉산이 집중호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일대 주민 14명이 숨지는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였다. 한 사람의 일손이 아쉬울 때, 김씨는 내 일처럼 식사, 빨래, 식수를 나르며 6개월간 이재민을 도왔다. 이듬해부터는 새세대 육영회(현 아이 코리아)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외로운 독거노인을 찾아가 의복과 식사를 챙기고, 저소득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데리고 눈썰매장, 놀이공원에 데리고 다녔다. 20년 전부터는 통진읍에 탁아소를 열어 사회복지법인 통진 어린이집을 운영해 오고 있다. 당시 통진읍에는 부모가 공장과 논밭으로 일하러 가면 대책없이 집에 남겨져야 했던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모아 탁아소를 열고 맡아 키워왔다. 2008년 아이코리아 김포시 지회장으로 뽑힌 뒤에는 몸이 더 바빠졌다. 독거노인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공부방 16개소에 급식과 간식을 지원하고 형편이 어려운 동거부부와 다문화 부부에게 결혼식을 무료로 올려 주고 혼수품을 지원하는 일이 그녀의 몫이었다. 지난해 김포시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고 나서는 회원들과 함께 시가지 청소 활동도 시작했다.

◇김포시 봉사의 대모

김씨는 봉사의 핵심을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1945년 황해도에서 일본 유학파 지식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네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섯 살 되던 해, 한국 전쟁이 터졌고 식구들은 서울 친척집으로 피란을 갔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던 친척은 그녀의 일본인 어머니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그런 냉대와 구박 속에 어머니는 병을 얻었고 얼마 가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 후, 일본 외가에서 두 언니를 데려가고 남은 두 딸을 아버지가 홀로 키웠다. 어머니를 잃고 언니들을 떠나보내고, 남의 집살이를 10년 넘게 하면서도 그녀에게는 가슴에 한이 맺히기보다 사랑이 더 많이 쌓였다. 그건 순전히 아버지 덕분이었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부뚜막에 신발을 데워서 학교 갈 때 내어주시고, 집에 올 때는 저만치서 겨드랑이에 신발을 끼고 나와 기다리고 계셨어요. 밥을 하면 공기에 담아 아랫목에 데워 먹여주시고, 저희 빨래도 다 해 주셨지요."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배웠다고 했다.

김씨의 진심어린 봉사는 종종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곤 한다. "하루는 봉사를 하러 갔는데 할아버지가 손을 꼭 잡으며 그러세요. '물건 주고는 바쁘게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자네는 말벗이 돼줘 고맙다'고요. 제가 아이들을 꼬옥 안아주면 그 마음을 아이들이 먼저 알아요. 다음에 만나면 '할머니'하고 달려 옵니다."

김씨는 요즘 지역 사회 여성들과 복지기관을 연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봉사는 일단 해 보고 나면 고생을 해도 다음에 가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일반 주부들이 즐겁게 봉사할 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