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24] 머물러 있는 남자와 떠나온 여자의 사랑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겠지만, '익숙한 이곳'의 대척점인 '낯선 그곳'에서 보내게 될 비현실적인 시간에 대한 기대감은 많은 여행자가 가지는 공통점일 것이다. 내게는 마냥 설레는 타지인 그곳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지루한 일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여행객은 별로 없다.

영국의 로맨스 영화 '노팅 힐'의 여자 주인공 안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에게 런던이라는 도시는 이국적인 여행지이지만, 남자 주인공 윌리엄 대커(휴 그랜트)에게는 고향이자 생활 터전이다. 여성인 안나는 떠나온 자이고, 남성인 윌리엄은 머물러 있는 자이다. 이것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세간의 남녀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선입견을 정면으로 비트는 구도이다.

안나가 세계적인 명성의 할리우드 여배우이고, 윌리엄이 보잘것없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일개 소시민이라는 설정 역시 그렇다.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우월한 남성이 그보다 조건은 못하지만 아름답고 착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스 장르의 일반적인 서사 법칙과 반대인 것이다. 하다못해 윌리엄이 알고 보면 재벌가의 숨겨진 자식이었다거나 하는 반전(反轉)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혀 별개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을 연결하는 중매인은 다름 아닌 런던이라는 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관광지이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공간이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서 하나의 느낌으로 서서히 합쳐진다. 소박하고 조용한 윌리엄의 '영국적 삶'의 태도와 안나의 옛 애인(알렉 볼드윈)으로 상징되는 거만하고 경박한 '미국적 삶'의 태도가 극적으로 비교되는 점도 흥미롭다.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소심하고 무뚝뚝해 보일지라도 내면적 진정성을 품고 타인을 대하는 것이 영국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들의 가치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수많은 남성이 '노팅 힐'의 윌리엄을 로맨틱 영화 속의 가장 공감 가는 남자 캐릭터로 꼽는 이유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