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멘털 붕괴'

이스라엘 좌파 지식인 카를로 스트렝거가 지난해 책 '하찮음의 공포(The Fear of Insignificance)'를 냈다. 심리학자인 스트렝거는 '21세기 인류는 자신을 가장 성공적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드는 세계화 체제 때문에 존재 의미를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이런 신인류를 '호모 글로벌리스'라고 이름 붙였다. '호모 글로벌리스'들은 세계 최고 스타들 얘기만 하루 수백 번씩 들으면서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다. 이 책은 지난 5월 '멘털 붕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일본에선 쓰나미 대참사와 원전 사고가 터지자 '소테가이(想定外)'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뜻이다. 올해 우리나라에선 최고 인기 신조어가 '멘붕'이다. '멘털 붕괴(mental 崩壞)'를 압축한 말이다. 이 말은 게임 사이트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간단히 말해 '평정심을 잃은 상태'다. 이젠 이 말을 언론도 스스럼없이 쓰고, 출판사는 책 제목에 갖다 붙인다. 영어 사이트에서 자주 보는 'BUBD'와 비슷한 뜻이다. '브레이크업'과 '브레이크다운'을 합쳐 '어떤 관계가 끝장나고 일어나는 와해 상태'를 말한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던 '멘붕'을 방송 예능 프로 출연자들이 입에 올리더니 개그 프로에도 '멘붕멘붕' '멘붕스쿨' 코너까지 생겼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도 이 말을 썼다. 그제 서울지역 합동연설회에서 "내가 네거티브에 너무 시달려서 '멘붕'이 올 지경"이라고 했다. 정치인들은 평소 하지 않던 말도 젊은 유권자와 소통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일부러 쓰기도 한다.

▶'멘붕'은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지속적이고 세계적인 병리 현상일 수도 있다. 스트렝거는 후자 쪽에 주목한다. 때로는 그 뜻이 엉뚱하게 좋은 방향으로 진화할 때도 있다. 상대가 너무 훌륭했을 때 그래서 할 말을 잃을 정도로 감동을 받아도 '멘붕'이라고 한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출연팀이 멋진 공연을 펼치자 심사위원이 "완전 멘붕!"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행어는 세태를 되비춘다. 서울 강남에서는 부동산 침체로 '아파트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이 잠 못 이룰 때'를 '멘붕'이라고 부른다. 늙으나 젊으나 돈이 있든 없든 우리를 '멘붕' 상태에 몰아넣는 일이 한둘 아니다. 어제 하루만 봐도 '빈곤층 116만가구는 번 돈의 43%를 빚 갚는 데 쓴다' '은퇴 중산층은 자영업에 실패가 많아 개인회생 신청이 사상 최다'라는 기사가 신문 1면에 가득하다. 사방이 벽에 가로막혔다. '토털 멘붕'이라는 말도 나올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