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국 수준 검시… 억울한 죽음 많아"

"누구나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복지국가예요. 국민 소득 2만불 시대를 열었지만, 사후(死後) 인권을 다루는 검시제도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후진국 수준입니다."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인 문국진(87) 박사가 51권째 저서 '죽은 자의 권리를 말하다'(글로세움)를 냈다. 현행 검시제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책이다. 그는 "지능형 범죄가 늘어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만큼 '사후권리'를 보호할 검시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사인(死因)을 규명할 부검을 실시하는 책임이 경찰관·의사·검사·판사의 네 갈래로 분산돼 있어요. 검시 주체는 검사, 사건 현장 수사는 경찰관이 하고 죽음을 증명하는 건 의사가, 부검 허락은 법원이 하고 있죠. 부검을 하기 위해서는 경찰이 변사라고 판단해야 하고, 검사가 법원에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해야 합니다. 영장을 근거로 의사에게 부검을 의뢰하죠. 이게 대체 뭡니까?"

그는 "미국처럼 전담검시제도를 실시하는 나라에선 처음 사건 현장에 검시관이나 법의관이 먼저 가서 죽음의 원인에 대해 세밀히 조사를 하는데, 우리는 경찰이 먼저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변사라고 보고할 경우에만 검시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묻혀버릴 소지가 많다"며 "특히 여름에는 시체가 현장에 2~3일 방치되면 부패가 빠르게 진행돼 정확한 사인 규명이 어렵다"고 했다.

문 박사는 국내 법의학자 1호로 불모지인 한국 법의학을 개척해왔다.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헌책방에서 집어든 낡은 책 한 권이 인생행로를 바꿨다. "법의학은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한 줄에 가슴이 방망이질 쳤고, 곧바로 법의학에 입문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창립멤버로 법의학 과장을 지냈고, 1970년 국내 최초로 고려대 의대에 법의학과를 설치했다. 법의학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왕성하게 책을 써온 저자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예술가의 '작품'을 부검하는 '법의탐적학(法醫探跡學)'에 꽂혀 있다. 시신이 없어도 고인에 관한 문헌이나 예술작품을 분석해 사인을 밝힐 수 있다는 것. 마치 시체를 부검하듯 각종 문건의 감정을 시행한다는 뜻에서 '북오톱시(책부검)'라고 이름 붙이고, '법의탐적학'이라는 새 분야도 개척했다. 그는 "현재의 법의학은 형사사건의 해결에만 치중돼 있는데, 앞으로는 역사·문학·예술 등으로 확장돼 유명 예술가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