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심청·주몽… '한국의 얼' 화폭에

"아무리 국제화한다 해도 결국 우리는 우리 식의 느낌과 생각을 갖고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를 버리고 서양 방법과 의식을 흉내 낸다면 누가 나를 알아주겠습니까."

그는 강렬한 오방색 화면에 정감 있는 필치로 우리 역사·설화 속 인물들을 담아냈다. 주몽, 처용, 흥부, 심청, 녹두장군…. 옛이야기 속 수많은 인물이 조선시대 민화를 연상케 하는 그의 그림 속에서 되살아났다.

한국적 색채로 한국인의 얼을 그려온 이만익(74) 화백이 9일 오전 1시 57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황해도 해주 태생인 이 화백은 경기고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10년간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다. 작업 초기인 1960년대엔 서울역 대합실, 청계천 등 고단한 서민의 삶이 담겨 있는 도시의 뒷모습을 강렬한 표현주의 기법으로 묘사한 사실주의 계열 회화를 주로 그렸다.

그가 작가로서의 시야를 넓히게 된 것은 1973년 도불(渡佛)이 계기가 됐다. 1년간 파리의 아카데미 괴츠(GOETZ)에서 연수하며 작가로서의 시야를 넓혔다. 2년 후 선보인 귀국전에서 강렬하면서도 문학성 짙은 회화 세계를 펼쳐내 화단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양 그림을 배우겠다고 파리에 가 오히려 우리 미(美)의 뿌리에 대해 각성했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다음엔 '한국적인 것'의 상투성을 극복하고, 그것을 촌스럽지 않게,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이후로 그는 한국인의 전설과 신앙, 기쁨과 슬픔을 그려냈다. 역사와 전설 속 인물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 없는 얼굴들도 숱하게 그렸다. '역사와 현실의 조화'를 꾀했다는 평을 받았고, 삼국유사, 청산별곡, 심청전 등 고전에 나타난 한국인의 마음을 형상화해 온 성취를 인정받아, 1993년 조선일보사가 제정한 제5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다. 굵은 검정 테두리에 청색, 적색, 황색 등 오방색으로 채색해 한국인의 얼굴을 명징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은 교과서 그림으로, 소설 전집 삽화로,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로 사용되며 대중에게도 가까이 갔다. 동시대 서양화가로서는 드물게 구상회화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진 것도 그의 특색. "어차피 예술은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 따로 관객 따로, 또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해석하는 그림은 싫다." 생전의 그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모두 35회의 개인전을 가졌던 이 화백은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았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유족은 부인 김대화씨, 아들 민겸(MK컬렉션 대표)씨, 딸 민선(콘텐츠 디자이너)씨. 빈소 삼성서울병원, 발인 11일 오전 9시30분, (02)3410-6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