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경기부양… 금리·재정·세제정책은 엇박자

"경기를 살리겠다면서 추경(추가경정예산)은 안 된다고 하고,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려 경기 살리겠다는데, 정부는 대기업과 부유층 세금을 올리겠다고 하네요. 요즘 경제보다 예상하기 힘든 게 정부 정책입니다."

8일 발표된 세제개편안에 대해 한 외국계 은행 임원은 이렇게 촌평했다. 그는 "정부가 기관별로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했다.

정권 말기에 접어든 정부가 경제운용에 있어 부처별로 정책 엇박자를 내, 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에서 한국은행은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또 한편으론 정부가 재정 지출 확대를 꺼리면서 부유층과 대기업에 대해선 증세에 나서 시장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고위관계자는 "정권 말기라 정부가 힘이 빠질 수밖에 없지만, 정책을 펴는 철학이라도 좀 더 일관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리·재정·세제 정책 간 엇박자

하반기 들어 정부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내수 활성화에 나서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지난달 21일에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내수 활성화를 위한 끝장토론까지 하고, 그 후속조치를 챙기기 위해 경제활력 대책회의라는 장관급 회의체까지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 정책실행을 놓고는 부처 간에 엇갈리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경기부양에 가장 적극적인 기관은 41개월 만에 기준금리 인하에 나선 한국은행이다. 한은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3.25%에서 3.0%로 0.25%포인트 내리면서 가계·기업의 이자 상환 부담을 덜어줬다. 한은은 8월 금리는 동결했지만, 전문가들은 "하반기 한 차례 더 금리 인하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재정정책은 '경기부양'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는 최근 새누리당이 공식 요청한 6조원 규모의 추경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누차 강조해온 '실탄 아끼기'가 현 시점에선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8일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투자·소비심리를 위축시킬 만한 각종 증세조치를 담았다. 정치권의 요구가 거셌다지만, 자산가·대기업에 대한 증세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재정건전성 확보가 물론 중요하지만, 이번 세제개편안은 정부가 공언했던 불필요한 비과세혜택 정비는 못하고 대기업·자산가 때리기의 모양새만 갖췄다는 게 문제다. 올해는 비과세 감면규정 201개 가운데 역대 최대인 103개가 연말에 시행시기가 끝나는데, 정부는 이 중 24개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시행을 연장했다.

5년에 걸쳐 1조6500억원의 세 부담을 더 지게 된 대기업·자산가들은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의는 세제개편안 발표 당일 "투자위축이 우려된다"고 논평했고, 증권·은행업계에선 자본시장의 위축을 걱정하고 있다.

◇정책 통일성 떨어져 진짜 위기 때 대응 어려워질 수도

장기간 경기침체를 예상한다면 정부는 시장에 정책기조에 대한 신호를 단호하고 확실하게 줘야 한다. 경기부양책도 시기를 맞춰서 한 번에 같은 방향으로 써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지금처럼 분야별 정책이 따로 갈 경우, 정작 큰 위기가 닥쳤을 때는 정부가 내놓을 정책 여력이 떨어질 수 있다.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장은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면서, 단기적으로는 경기를 떠받쳐야 하는 정부의 고민이 이해는 된다"면서도 "현재의 금리·재정·세제 정책은 방향성이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현 원장은 "세제개편의 경우 비과세감면 정리가 좀 더 이뤄졌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영 한양대 교수는 "정부 부처들이 정책 수립하는 데 있어 정치권과 여론의 눈치를 보며 '면피'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교수는 "아직 대규모 재정지출에 나설 때는 아니라고 보지만, 경기부양책은 정부지출 확대와 감세, 금리 인하 등이 패키지로 이뤄져야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정부가 한편으로는 기준금리를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증세에 나설 경우 정책효과가 서로 상쇄돼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정권 말 정부가 조율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면서도 "정책방향이 상충될 소지는 없는지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