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파워 클래식] 2200년 전 그려낸 인간 군상… 우리들을 보는 듯한 섬뜩함

중국인의 행동방식과 내면을 잘 알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골라달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내놓을 것인가? '논어'? 아니면 '장자', 혹시 '삼국지연의'? 그도 아니라면 시대를 훌쩍 내려와 노신의 '아큐정전'?

내놓은 책이 달라도 하나같이 머리가 끄덕여지는 고전들이다. 그러나 나라면 망설이지 않고 '사기'를 꼽는다. 중국인과 그 문화의 밑바닥에 흐르는 행동과 사유의 원형이 이 책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대한 이상과 고결한 의리, 속물근성과 세속적 야망 등 인간 행동의 파노라마를 그보다 더 다양하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책은 없다. 자주 그렇게 말하며 학생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한다.

'사기'를 처음으로 접한 때는 고등학교 학생 시절로 기억한다.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 책에 제대로 빠진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다. 책을 게걸스럽게 읽던 그 무렵 그리스 비극에 끌려 번역된 책을 모조리 구해 읽었다. 운명에 항거하다 처참하게 무너지며 종말을 향해 사라지는 주인공의 드라마는 다른 어떤 역사나 문학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지금껏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대학 초년의 독서체험이다.

그런데 그에 상대되는 작품으로 사마천의 '사기'에도 빠져 버렸다. 특별한 계기도 있었다. '춘향전'연구가로 유명한 김동욱 교수님께 유몽인의 '어우야담'강의를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고전을 잘 읽으려면 중국 고전을 널리 봐야 하는데 한 종의 책으로 풍부한 지식을 듬뿍 얻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사기'이니 꼭 읽어보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사기'를 꼼꼼하게 읽었는데 당시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세계문학 전집 속에 들어가 있는 선집이 유일하였다. 그 선집도 분량이 적지 않았으나 후딱 읽고 난 뒤 전집을 읽지 못해 아쉬워하며 원문을 읽으려고 무모하게 덤빈 기억이 난다.

그리스 비극과 '사기'를 비슷한 시기에 함께 탐독하면서 그 이후로 동서양 고대의 양대 서사물을 자주 겹쳐서 생각하곤 했다. 특히 유방과 중국 천하를 다투던 항우가 장엄하게 몰락하는 역사를 기록한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을 때면, 늘 그리스 비극을 떠올렸다. 20대 후반에 천하를 제패했던 항우가 31세에 비참하게 패배하는 역사의 묘사는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비극 작품이다. 장구한 중국 문학사에서 제대로 된 비극은 이 한 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항우뿐만 아니다. 그 가운데 '백이열전(伯夷列傳)'은 본문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기도 했다. 순수한 인간 백이가 굶어죽은 사실을 두고 사마천이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자는 징벌한다"는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폭로하고, 인간세계에 진정 정의가 존재하는지 하늘을 향해 항의하듯 묻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그처럼 근본적 질문을 곳곳에서 내뱉기에 이 책은 그저 역사서가 아니라 사상서다.

백여 편에 달하는 본기와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에는 흥미롭고 문제적인 인물이 거듭 등장한다. 2200년 전에 실존했던 인간 군상을 묘사한 '사기'속 인물은 그 시대 고유의 빛깔을 지니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과 행동 양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언제 누가 읽어도 우리를 둘러싼 많은 인간의 전형을 묘사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역사 속에 나타난 특정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사기'는 "대부분 전체사회에 착안하여 인물을 통해 일종의 현상을 반영한 것이지 개개인의 자잘한 사생활을 기록하지 않았다"라고 양계초가 잘 말해놓고 있다. 후대의 역사가가 사마천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학 이후로 좋아하는 책 목록에서 '사기'가 빠진 적이 없다. 대학 졸업할 때쯤 해서 대만에서 나온 '사기'원본을 구해 읽었는데, 손때가 묻은 그 책은 지금도 서가에 꽂혀 있다. 그 무렵 일본인 학자 다카가와 가메타로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이란 유명한 주석서에 감동하여 친구 아버지 소장의 원본을 빌려다 한동안 읽은 기억도 생생하다. 왕보시앙(王伯詳)의 '사기선(史記選)'은 참 좋아하는 선집으로 몇 권을 사서 학생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지금은 완역도 두세 종 나와 있고 번역과 해설도 수준급이라서 골라서 읽어야 할 정도다. 책 한 권으로 중국인을 깊이 이해하려고 한다면 여전히 나는 '사기'를 권하고 싶다.

[140자 트윗독후감]

"계포편 '진실로 용기 있는 자는 가벼운 죽음을 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제일 좋았어요. 모든 것을 잃은 굴욕적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굴욕을 견디고 감수하며 자신을 믿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사마천의 평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네요." (페이스북 응모자 Puhe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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