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64] 화신백화점 큰불 난 뒤 조선에 '119' 번호 탄생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쯤, 음력설을 1주일 앞두고 손님들로 붐비던 종로 2정목(2가) 화신백화점에 큰 불길이 치솟았다. 시내 소방대는 물론, 인천 소방대까지 긴급 출동해 진화에 나섰으나 동관·서관 2개 동이 불타 버리고 500명 점원과 수천 명 고객이 아비규환을 이루며 피신했다. 정전까지 일어나 도심은 한 시간 동안 암흑천지가 됐다(1935년 1월 28일자 호외).

화재 원인을 조사해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백화점 옆 과일 노점상이 켜놓은 촛불이 옮겨 붙은 것이었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재산 피해액이 45만원(약 90억원)에 이르렀다(1935년 1월 29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사장 박흥식(朴興植)은 풀죽지 않았다. 그는 "불난 집이 더 비싸게 팔린다" "불같이 활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큰소리치고는 총독과 담판 끝에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같은 해 8월 15일 백화점 영업을 재개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소방대의 책임을 거론하며 총독을 압박한 결과였다(정재학 '경성쇼핑5').

대형 건물 두 동을 통째로 태워버린 초유의 화재가 안긴 충격은 컸다. 엉성한 소방 시스템이 도마에 올랐다. 1925년 4월 1일 경성소방서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땅엔 소방전문 관청도 독립돼 있지 않았다. 불 끄는 일은 민간 자치 소방조직인 각 지역 소방조(消防組)에 많이 의존했다. 1922년의 경우, 전국에 소방차가 20대밖에 없었다(1923년 7월 5일자). 소방조원들의 전문성도 떨어졌다. 경성 시내 태평통(태평로)에 난 불을 끄러 출동했던 소방대가 "큰불도 아닌데 소방대를 불렀다"고 불평하며 제대로 끄지 않고 돌아갔다가 큰불로 번지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1926년 5월 22일자).

1935년의 화신백화점 대화재 이후 소방 행정이 달라졌다. 대화재 뒤 첫 연말이 다가오자 경성소방서는 시내의 모든 극장과 백화점마다 소방관 1명씩을 상주시키며 화재 경계를 하는 특단의 대책까지 실행했다(1935년 12월 21일자). 1939년엔 부산소방서가 설치됐고 청진(1941), 인천(1944), 함흥(1944) 등에 소방서가 생겼다.

화재 신고 전화 '119'도 화신백화점이 불탄 해에 탄생했다. 경성 중앙전화국은 1935년 10월 1일 전화번호 안내 번호 '114' 등 10개의 서비스 번호를 제정하면서 '119'를 도입했다('한국전기통신100년사'). '119'번호는 1927년 일본 도쿄·교토 전화국에서 처음 도입했는데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