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게 이긴 사람만 책을 내는 건 아니다

"다른 암 투병기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씩씩해서 초인처럼 느껴졌어요. 그들은 의학계에 아는 사람도 많고 정보도 많고 통증은 문제가 아닌 듯 보였죠. 저는 아니었어요. 죽지 않으려면 현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제게 현재는 아픈 거였어요. 이 아픔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를 묻고 또 물었죠."

번역가로 활동해온 이명(본명 이강선·52)씨가 신간 '몸이 아프다고 삶도 아픈 건 아니야'(뮤진트리)를 냈다. 나이 쉰에 갑자기 맞닥뜨린 유방암. 책은 암 진단을 받던 2010년 1월 21일부터 방사선 치료 마지막 날(먹는 약은 제외)인 2010년 11월 5일까지 블로그에 띄운 글들을 모은 것이다. 번역문이 아니라 '저자'로 이름을 올린 생애 첫 책이다. 우연히 블로그를 본 출판사 관계자가 "생명의 진행 과정을 알려주는 투명한 글발에 반해" 출간을 제안했다.

암 투병기는 수십, 수백권을 헤아린다. 그의 책이 눈길을 끄는 건 '나는 이렇게 완치했다'는 암 극복기,완료형 투병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투병기이기 때문이다.

14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만난 이씨는 몸에 딱 붙는 흰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하늘색 아이섀도와 빨간 립스틱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의외죠? 암 환자가 이런 차림으로. 전엔 저도 있는 그대로의 제가 좋아서 옷차림에 별 신경 안 썼는데 이젠 달라졌어요. 그만큼 몸이 나아졌단 증거랍니다." 그가 맑게 웃었다.

그의 책엔 나으려면 이런 음식 먹어라, 어떻게 운동해라 같은 지시사항이 없다. 대신 죽을 만큼 아팠다, 화날 만큼 서운했다 등 투병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이 소소하지만 너무 진해서 물이 쑥 배어 나올 것처럼 쏟아진다.

암으로 인한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오래가는지도 세세히 적혀 있다. '항암주사를 맞으면 최소 6일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 몸이 벌벌 떨리고 등 뒤 허리께에서 갈퀴로 파내는 듯한 통증이 등뼈를 타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면 언제 아팠냐는 듯 통증이 사라진다, 부디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흥미롭다. 제 일처럼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남 일처럼 무관심한 사람도 있다. 연락을 뚝 끊은 사람도 있다. 상대방은 별 뜻 없이 던지는 말에 그는 서운해하고, 가끔은 분노한다. 같은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병은 곧 '위기(위태로운 기회)'였다. 늘 남과 비교해 초라한 자신을 보며 주눅 들었던 그였지만 더 이상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됐다. 조그마한 몸으로 비바람을 받아내며 하늘하늘 서 있는 야생화를 보면서 용기를 얻는다.

한 달 전 그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산이 많은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책을 읽고,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 변을 달린다. "꽃은 지고 계절은 바뀌어도, 여전히 꽃은 피고 계절은 돌아와요. 생명은 늘 존재하고, 우린 살아있다는 걸 많은 분들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