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딸 이름으로 만든 장학금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나중에 꼭 성공해서 이 장학금을 채워주세요"

지난 4월 건국대 수의학과 건물에 장학생 모집 공고가 붙었다. 이 대학 수의학과에 다니다 지난해 교통사고로 숨진 유혜선(당시 25세)씨의 이름을 딴 '유혜선 장학기금'. 당시 유씨의 부모는 딸의 유학 비용으로 모아둔 돈 등 총 1억30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으면서 특별한 조건을 달았다. "성적으로만 장학생을 선발하지 말고 현재 경제적 여건이 어렵지만, 나중에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학생 위주로 뽑아달라"는 것.

따라서 공고문에도 '내리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내리사랑'이란 장학금 수혜자가 사회에 진출한 뒤 후배들을 위해 다시 장학금을 내놓으라는 것.

"가정 형편 탓에 말수도 적어지고 움츠러들 때도 있지만, 지금의 눈물 속에 꿈을 꾸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만 학비를 충당하는 상황에서 선배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 진출해 다시 후배를 돕고 싶습니다."

'유혜선 장학생'에 신청한 학생 20여명이 적어낸 포부들이었다. 이렇게 선발된 장학생 4명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장학기금에 돈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8일 오후 3시 건국대 수의과대학 5층에서 '유혜선 장학금' 첫 수여식이 열렸다. 이날은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사고를 당한 혜선씨의 첫 번째 기일(忌日)이기도 했다. 수여식에는 혜선씨의 가족과 선후배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유씨의 부모는 장학생 4명에게 직접 장학증서를 줬다. 혜선씨 어머니 황명숙(52)씨는 수여식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학기당 200만원씩 1년간 지원받게 되는 '유혜선 장학기금'의 첫 수여자로 뽑힌 수의과대학 학생 4명의 평균 학점은 3.6점(4.5점 만점). 학생들은 모두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고 있다. 여승구(24)씨는 "학비와 생활비를 아르바이트 하면서 벌면서도 종종 나보다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무료 과외를 해왔는데, 이번 장학금을 받으면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고 했다. 노한영(여·21)씨는 "입학할 때부터 대출받은 학자금만 2000만원 정도라 재학 중에 원금 갚기도 빠듯했는데, 이번 장학금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3학년 송지홍(23)씨는 "항상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었는데, '유혜선 장학금'을 받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유혜선 장학금'은 커가고 있는 장학금이다. 장학생들의 내리사랑 약속뿐 아니라 혜선씨의 가족들도 여전히 조금씩 힘을 보태는 것이다. 혜선씨 부모는 처음 장학금 기부를 결심했을 때 1억원을 내기로 했다. 맞벌이 부부에게 1억원은 큰돈이었다. 먼저 8000만원을 내놨다. 이후 목돈이 생길 때마다 두 차례 더 기탁해 목표보다 3000만원을 더 냈다.

혜선씨의 아버지 유한욱(56)씨는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우리에겐 딸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년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날 장학생들을 새로 만나게 되는데, 장학금을 내놓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슬프기만 했을 날에 아들딸이 4명씩 더 생기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유혜선 선배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젠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장학금 수여식 내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장학금 허투루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혜선씨) 어머님·아버님 마음 채워 드려야겠구나' 그런 생각 했어요. 저희가 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려고요."

노한영씨는 장학금 수여식 내내 눈물짓던 혜선씨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