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 "다치고 힘들어도 박수소리에 행복해요"

"얍" "얍"…. 뙤약볕 아래 날렵한 몸매의 두 여자 무사가 마주섰다. 황민희(32)씨와 박인숙(24)씨는 날쌔고 화려한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며 시범을 이어나갔다. 멋진 자세로 마무리한 두 사람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차림은 조선시대 무사였지만 곱상한 외모는 숨기기 어려웠다. 하이라이트인 실전 베기 시범에도 황씨가 남자 무사들과 함께 등장했다. 진검을 휘둘러 짚단을 토막내자 관객들의 박수가 터졌다. 팔꿈치를 다친 박수현(24)씨는 아쉬운 눈빛으로 동료들의 시범을 지켜봤다.

지난 14일 오전 수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 마당에서 '무예 24기' 시범이 펼쳐졌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관람객들을 위해 열리는 상설 공연이다. 겨울에는 쉬지만 화성문화제 등 특별 행사에서는 더욱 다양한 기예를 선보인다. 국내는 물론 국외 초청 공연도 펼칠 정도로 제법 알려졌다. 무예 24기는 조선 정조 당시에 편찬된 교범인 '무예도보통지'를 바탕으로 재현한 전통무술이다.

21명으로 구성된 무예 24기 시범단에는 여성 무사 3인방이 있다. 남자들도 연마하기 쉽지 않은 무예이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끈다.

"워낙 몸을 쓰는 운동을 좋아했기에 무예 24기도 익히게 됐지요. 무기나 기술이 다양해 하나씩 차근차근 수련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맏언니인 황씨는 지난 2005년에 입문해 벌써 8년째 시범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머슴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고 중학교 2학년때 합기도 도장에 등록해 수련을 계속했다. 2003년 24세에 인천전문대 무도과에 입학해 복싱을 시작했고, 이듬해 전국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은메달도 땄다. 지금은 합기도 3단에 유도·경호무술을 합쳐 공인 5단이 됐다.

무예 24기는 동작이 클 뿐 아니라 칼, 창 등 무기를 다루기 때문에 적잖은 힘이 든다. 여름철이 아니면 무게가 7㎏에 이르는 갑옷도 차려입는다. 운동 신경과 기본 체력이 필수일 수밖에 없다. 단원들은 모두 오디션을 거쳐 선발되고, 여성도 예외는 없다. 박인숙씨도 중학교에서 조정 선수로 활동했고, 고등학교부터 수련한 태권도가 3단이나 된다. 박수현씨는 운동 경력은 없지만 고교 2학년때 취미 삼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무예 24기에 입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07년부터 시범단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수련 과정이 만만치는 않다. 박인숙씨는 "태권도는 맨손에 발차기 중심이지만 무예 24기는 처음에는 무기를 다루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시범단원들은 매일 오전 9시쯤 화성 행궁에 나와 신풍루 옆에 있는 북군영 마당에서 꼬박꼬박 수련과 리허설을 빠뜨리지 않는다. 시범단에서 경력이 4번째 고참인 황씨의 경우 거의 모든 무예를 섭렵했다. 특히 쌍검에 자신을 갖고 있다. 박수현씨는 작은 체구를 숨길 수 있는 등패(등나무로 된 방패) 시범을 보일 때 가장 멋지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한다.

특히 수련이나 시범을 하면서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잦다. 그러나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다고 한다. 황씨는 2010년 허벅지 근육이 끊어지고, 교전 시범을 보이다 새끼손가락이 부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는 "멍 정도는 말을 꺼내기도 우스울 만큼 부지기수"라며 웃었다. 한 달 가까이 시범을 쉬고 있는 박수현씨는 등패를 들고 교전 시범을 하다 왼쪽 팔꿈치가 뒤로 꺾였다. 박씨는 "하루라도 운동을 못하면 몸이 근질근질한데 연습을 제대로 못해 답답하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모두 미혼이다. 무예 24기 입문 초기에는 부모님도 나이 든 딸이 온몸에 땀냄새와 흙을 묻혀 귀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수현씨는 "어머니가 첫 공연을 보고나서 눈물을 흘리더라"며 "피부도 많이 타고 거칠어졌지만 오히려 친구들이 당당한 내 모습을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외동딸인 박인숙씨는 "부모님께서 '힘들어 보이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니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신다"고 거들었다. 세 사람은 여전히 매일 아침마다 "다치지 않게 몸조심 해라"는 인사를 듣는다고 한다.

"더운 날씨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절로 힘이 솟아납니다." 박인숙씨는 "맨손 무예, 활, 말타기 등 다양하고 어려운 만큼 도전하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며 "지금 마상 무예도 하고 있는데 좀더 수련해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를 훌륭하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황씨는 "처음에는 남성 단원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때문에 더욱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며 "선조들이 남긴 전통 문화유산을 지켜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무엇보다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