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같은 線, 당신의 시선을 찌르다

톱니바퀴, 원, 타원, 방패, 그물…. 기하학적 요소들로 빼곡한 화면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컴퓨터로 만든 도안(圖案)이나 포스터처럼 보인다. 기계로 찍어낸 듯 원(圓)은 완벽하고, 선은 반듯하며, 모서리는 날카롭다. 살짝 선을 벗어난 실수도 없다. 그림의 표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기계적 느낌은 배가 된다. 옻칠한 나무판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표면은 시트지를 붙인 것처럼 매끈하다. 온기(溫氣)라곤 느껴지지 않는 이 작품들은 사실 엄청난 수공(手工)의 결과물이다.

"내 작품에 인간미가 없다고요? 내 친구 중 한 명은 잠이 오지 않으면 미적분 문제를 풀어 마음의 안정을 얻더군요. 기하학적 이미지는 '쿨'하게 사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쿨하다고 해서 비인간적인 건 아니지요. 내 작품도 그래요. 이성적이고 차가운 표면 뒤에 숨어있는 감성적 노동, 그거야말로 '인간미' 아닙니까?"

17일 오후 경기도 광명의 작업실에서 화가 이상남(59)이 사포(砂布) 연마기를 가리켰다. 그는 물감을 여러 겹 칠한 후 겉 물감을 사포로 살살 갈아냄으로써 속 물감을 드러낸다. 마치 겉 지층을 걷어내면 아래 지층이 드러나는 것처럼 문양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작품에 최대한 '손맛'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캔버스 표면을 평평하게 만든다. 일종의 트릭(trick)이랄까." 칼날처럼 뾰족하고 신경질적인 선(線)들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장치'다. "수많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 사람들이 그림을 보게 하려면 독특한 시각적 자극이 필요하다. 나는 관객의 눈에 상처를 낸다는 생각으로, 날카로운 라인과 에지(edge)를 만들어 냈다. 복잡한 이 화면의 어느 한 부분에라도 눈길이 닿게 되면, 관객은 곧 화면 속으로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될 거다."

이상남 개인전 'Light+ Right (Three Moons)'가 2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청담동 PKM 트리니티갤러리에서 열린다. 뉴욕을 근거지로 작업하는 그가 2008년 이후 4년 만에 갖는 국내 개인전이다. 출품작은 회화·드로잉 등 50여점. 건축 도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번 전시에선 여백 없이 화면을 꽉 채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젊었을 땐 '공(空)'에 관심이 많았죠. 존 케이지가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빈 것'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과 삶이 같은 선상에 있듯이 여백이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매한가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화면을 꽉 채우면, 그 이미지에 홀린 관객은 자신의 마음을 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상남은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후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19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표현주의 일색의 뉴욕 화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붓과 물감을 다시 손에 쥐었다. 이상남은 2005년 무렵부터 '설치회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0년 경기도 미술관 로비에 길이 46m의 대형 벽화를 설치했고, 지난해 봄엔 경남 사천 LIG손해보험 연수원 유리 통로에 길이 36m짜리 철판 벽화를 설치했다. 올 9월엔 폴란드 포즈난 신공항 출국장 벽 로비에 길이 73m의 대형 회화를 선보인다. 그는 "퍼블릭 아트의 묘미는 쓸모없어 보이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새롭게 변모시키는 데 있다.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공간 탐색'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02) 515-9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