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主流)가 된 '비주류 여왕'

맑은 물에 헹군 작은 조약돌 같다. 정유미(29)는 가냘픈 외모를 지녔음에도 단단한 인상을 풍기는, 드문 배우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달 초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에서 두 남자를 오가며 사랑받는 발랄한 주인공 '주열매' 역을 맡았을 때, 주변에선 "의외"라는 얘기들이 많았다. "어딘지 모르게 홀로 걸어가는 비주류(非主流)처럼 보이는 정유미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을?"이라는 반응이었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한 레스토랑에 만난 정유미 역시 스스럼없이 "그 말이 맞다"고 했다. "저한테 '주열매' 역할 하라고 제의가 왔을 때, 제 첫 반응이 '저를요? 왜요?'였어요. '나를 이런 밝은 로맨틱 코미디에 어울린다고 봐주는 사람도 있구나' 했으니까요(웃음)."

정유미는 2004년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데뷔, '사랑니' '내 깡패 같은 애인' '도가니' '다른 나라에서' 등 다양한 작품에 부지런히 출연했지만 케이블 채널 드라마는 처음이었다. "사실 처음엔 고민 좀 했다"고 한다. "'영화만 쭉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솔직히 있었어요. 대본이 마음에 들고, 역할이 엄청나게 탐났는데도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고민이었죠." 말을 마친 그가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배우를 시작한 이래로 "혼자 있어도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죽 들어왔다는 정유미다. 그런 그가 사랑밖에 모르는 '주열매'를 연기하기엔 노력이 꽤 필요했다고 한다. "원래 주변 배우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성격도 못 돼요. 주인공 이진욱씨랑도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존댓말하고 촬영 직전 꾸벅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그랬어요. 그래놓고 막상 '슛' 들어가면 입 맞추고 사랑한다 말하는 식이었죠(웃음)."

'주열매'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정유미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열매와 똑같은 마음이 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면서 "드라마 후반부 극 중 지훈(김지석)이 헤어졌는데도 '보고 싶다'고 찾아올 때, 처음으로 열매의 심정이 됐다. 나도 모르게 '나도 보고 싶었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했다.

촬영이 끝나면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배우도 많지만, 정유미는 "찍을 땐 집중해서 찍고, 끝나면 싹 잊는 편"이라고 했다. "사실 전 배우가 안 됐으면 정상인처럼 살기 어려웠을 거예요. 사람들과 말 섞는 법도 잘 모르고, 사회생활도 잘 못하고. 그나마 가진 재능이 집중력이에요. 찍을 땐 오로지 역할만 생각하고, 끝나면 잊는 거죠." 그래서 그는 "사실 아직도 인터뷰가 무척 힘들다"고 했다. "'그 장면 찍으면서 어땠나'란 질문을 받으면 답을 쉽게 못 찾겠어요. 사실 전 이미 잊어버렸거든요, 하하."

정유미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가진 매력을 새로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전 왼쪽과 오른쪽이 참 다르게 생겼어요. 어떨 땐 예쁜 것도 같은데 달리 보면 좀 희한하게도 생겼죠. 차근차근, 가늘고 길게, 그렇게 제 모습을 한 꺼풀씩 보여주면서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