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잡지 종말론'을 비웃는 여자

"발모제(發毛劑) 먹다 중단했죠? 전립선 치료제로 개발된 거."

"…아니 그런 걸 어떻게?"

"보면 알죠. 두상(頭相)이 좋으니 다 빠져도 괜찮을 텐데."

"?!"

잡지의 종말을 비웃는 여자의 관찰력은 과연 예리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가 질문공세를 펴대는 것이었다. 그 서슬에 인쇄 매체의 몰락을 섣불리 입에 담기 어려웠다. 장충동 '디자인하우스'에서 이영혜(李英惠·59)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영혜는 자칭 '월간지 공화국 총수(總帥)'다. 그가 스물일곱에 인수한 '디자인'이 올해 36년, '행복이 가득한 집'이 9월에 창간 25주년을 맞는다. 그 뒤로도 '마이 웨딩' '맘앤앙팡' '스타일H' '럭셔리' '멘즈 헬스' 같은 잡지들이 전부 흑자다.

7개 월간지 전체 판매량이 20만부다. 그가 만드는 항공사, 은행 월간지를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출판·TV·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서울 디자인 축제까지 발을 뻗었으니 문어(文魚)가 알았다면 슬며시 제 다리를 숨겼을 것 같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향 강원도 원주에서 '욕심쟁이'로 유명했다. 골목에서 딱지와 구슬을 싹 쓸어오더니 학교에 들어가선 글짓기·풍금(風琴)·그림·웅변대회 상(賞)을 휩쓸었다. "시간이 겹쳐 모든 대회에 다 나갈 수 없었다"는 말이 과장같지 않다.

홍익대 시절엔 운동에 탐닉했다. 탁구에 너무 열중하다 탈골될 정도였고 야구·배드민턴·골프도 수준급이다. 그는 한때 스스로를 '미스터 리'라 불렀다. '여자는 남자한테 지게 돼 있다'는 걸 느꼈다는데 스포츠에 대한 열광은 나름의 저항이었던 것 같다.

무역회사에 들어가서도 반골(反骨) 기질은 죽지 않았다. "외국 바이어와의 상담 자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꼭 수정 보완 지시만 오거든. 안 되겠다 싶어 꾀를 냈지. 샘플실에 있는 옷감 샘플 순서를 사흘간 다 바꿨어요. 그러고 나서 기절했지만."

그가 깨어나자 이번에 상사(上司)들이 쓰러질 차례였다. 도서관에서 책 분류를 온통 뒤바꾸듯 전혀 알 수 없게 장난쳐 놨으니 샘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화를 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입 디자이너'는 이렇게 욕망을 발산해갔다.

어느 날 운명을 바꿀 신문 광고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카이스트 출신 과학자가 월간 '디자인'지를 창간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뜸 잡지사를 찾아가 "이 회사에 오겠노라"고 선언했다. 8만7000원이던 월급이 5만원으로 깎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2호부터 편집, 판매에 간여하더니 몇 년 뒤 창업주가 유학을 떠난다고 하자 아예 잡지를 인수하고 만 것이다. 그가 "결혼할 때 줄 돈을 가불해달라"고 하자 그 성격을 아는 부모는 두말없이 통장과 도장을 내줬다.

인수 과정에서 위기도 겪었다. 1년에 열두 번 낸다는 규정을 못 지켰는데 하필 그때가 신군부(新軍部)의 등장기였다. 계엄사·사회정화위·문공부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다 급기야 공병우 타자기로 직접 쓴 민원서를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보낸 것이다.

"그때까지 낸 월간지를 찢어 10개 항목으로 분석했지요. 디자이너를 키우는 의미가 뭔지, 기업에 왜 디자인이 필요한지. 복간(復刊)이 출판계에서 화제가 됐어요.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 한창기 선생이 '너 군인들한테 몸줬냐'고 놀릴 정도였어요."

그는 주간·월간지 생존 비결이 분할(Segment), 독자층을 타깃화하는 데 있다고 했다. "'워킹우먼'에서 실패했는데 이유를 보니 정작 독자가 너무 바빠 읽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이브'란 잡지도 접었어요. 독자층이 '처녀'잖아. 처녀가 얼마나 많아요."

곡절 끝에 그는 '가십'과 '섹스'와 '야한 얘기' 없는 정통 잡지의 외길을 걸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 하나, 어떻게 미혼인 그가 '행복이 가득한 집'이며 '맘앤앙팡(母子)'이며 '마이 웨딩(결혼)'이며 '멘즈헬스(남자의 건강)'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딱 한 번 사랑해봤어요. 고대 법대 다니던 선배인데 이국적으로 생겼고 지성이 넘쳤어요. 일례로 전국 아리랑을 분석해 그 차이점을 분석해주는데 이런 식이야. 강원도는 산이 많아 '고개로 넘어간다'이고 밀양아리랑은 '날 넘겨주소'라는 식이야. "

첫사랑은 사법시험 날 끝난다. 밥 사주려고 기다리는 여자 앞에 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사시(司試)에 붙을 것이란 기대가 부담이 돼 응시도 안 한 거죠. '과일장사라도 하면 뒤에서 리어카라도 밀어주겠다'고 설득했는데 안 듣더군요."

이상(理想)도 현실에 발 디디지 못하면 그게 바로 '룸펜'이라고 이영혜가 말했다. "결혼도 안 한 이가 행복과 가족을 이야기한다는 비아냥에 전 이렇게 답해요. '꼭 총 맞아봐야 아픈 줄 아느냐'고. 사실 단 한 번의 사랑으로 모든 걸 알게 됐지. 이렇게는 써줘요. 내가 성격 나빠 데리고 살기 힘들다고 험담하는 이들에게 요즘 보니 성질 죽었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