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66] 수천 명 러시아 난민 "조선으로"

"…금발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리용하고자 경상북도 대구에서는 락쳔(樂天) 일력뎡(一力亭) 방천각(芳千閣)에 각각 한명의 절문 금발부인을 다려다가 오는 손님의 소매를 끌고자 함은 시국으로 말미암아 생긴 희비극이더라."

조선일보 1923년 1월 11일자는 '요리점에 노국랑(露國娘)'이라는 제목 아래, 대구의 요릿집에 러시아 여인이 고용됐다고 전했다. 이들은 러시아 난민. 볼셰비키 혁명 후 1922년 10월 혁명군이 연해주까지 진격하면서 패퇴한 제정 러시아 군인과 그 가족의 일원이다.

당시 시베리아 함대와 선박을 통해 원산에 입항한 난민만 한때 7500여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는 경성을 거쳐 열차 편으로 중국 봉천 등지로 간 이도 있고 선편으로 캐나다 등으로 떠나기도 해, 11월 말 현재 남은 난민은 4707명으로 조사됐다(12월 2일자). 며칠 뒤 총독부의 재조사에 따르면 난민은 함정 속에 기거하는 자 2800명, 상륙한 자 2772명 등 모두 5572명으로(12월 5일자), 난민 유입은 계속됐다.

"피난민의 궁상은 일긔가 치울수록 더욱이 궁지에 빠져서" 난민 돕기 '노국피난민 경성위문회'가 조직됐고, 외국인도 '자선연예회'를 열었고, 이화 학생들은 옷을 만들어 보냈다(12월 5·13·16일자). 이에 피난민을 대표한 '레폐데후(D. A. Lebedev)' 장군이 경성을 방문, '일음 모르는 동포의 긔증'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12월 16일자). 난민 생활은 고달퍼 '먹을 것이 업셔 처녀들은 빠이오링과 맨도링을 가지고 집집마다 단이며 한푼 두푼을 어더' '빵떡'을 사 먹고, 급기야 '긔한(飢寒)을 견디지 못하야 타고나온 군함 두척을' 경매에 부쳐 팔기도 했다(12월 16일자,1923년 3월 2일자). 요리점 '노국랑'도 이 같은 호구책의 일환이었다.

1923년 3월 177명의 난민이 상해로 떠났고(3월 11일자), 이어 67명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는 등(5월 25일자), 6월 말엔 난민 수가 1440명으로 줄었다(7월 3일자). 8월 초 마지막으로 1018명이 상해로 떠나면서(8월 11일자), 난민들은 10개월 만에 대부분 조선을 떠났다.

1928년 총독부가 조사한 조선 거주 외국인 현황을 보면 러시아인은 172명이었다(12월 6일자). 1925년 재개설된 '소비에트' 영사관 직원 수를 감안하면 150여명의 난민이 조선에 둥지를 튼 것으로 추정된다. 제정 러시아의 '명장귀족'이었던 이들은 양복이나 화장품 행상 등으로 호구를 해결했고, '소비에트' 영사관과는 '주의상 관계'로 서로 교제는 물론 만나도 말도 하지 않았다(1932년 6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