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아메리카노'

이란 수도 테헤란 도심, 10층 빌딩 옆벽을 벽화가 덮었다. 미국 성조기의 별 대신 해골을 그려넣고 붉은 띠는 미사일이 쏟아지는 궤적으로 바꿔 그렸다. 그 위에 큰 글씨로 'Down with the USA(타도 미국)'라고 썼다. 1979년 호메이니혁명 직후 444일 동안 점거당했던 미국 대사관 담도 온통 반미(反美) 그림이다. 자유의여신상이 해골 머리를 했거나 총을 치켜들고 있다. 호메이니와 주먹 쥔 민중도 그려놓았다.

▶이란은 북한을 능가하는 반미 국가다. '악마의 제국' 미국과 모든 관계를 끊은 지 30년이 넘었다. 그런 이란에서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가 코카콜라와 펩시다. 음식점에선 워낙 콜라 주문이 많아 종업원이 커다란 쟁반 가득 콜라 캔을 얹고 좌석을 돈다. 큰 페트병째 식탁에 놓아두기도 한다. 거리에서도 콜라병 들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본다. 단것을 좋아하는 데다 이슬람 율법에 따른 금주(禁酒) 국가여서 콜라로 갈증을 푼다고 한다.

▶코카콜라가 못 들어간 나라는 쿠바와 북한뿐이다. 김정일은 1980년대 말 "자본주의 침투의 척후병 코카콜라 대신 평양콜라나 신덕샘물을 마시라"고 했다. 90년대 중반까지 대학 운동권의 NL계 주사파도 "콜라와 커피는 미제(美帝)의 똥물"이라고 했다. 새삼 '미국 커피'를 둘러싼 입씨름이 통합진보당에서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주사파 쪽 구당권파의 백승우 전 사무부총장이 신당권파 유시민·심상정 전 대표가 회의에 앞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신다고 공격하면서다.

▶백씨는 당원 게시판에 "아메리카노를 먹어야 회의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노동자 민중과 무슨 인연이 있겠느냐"는 글을 올렸다. 당 안에서부터 백씨를 비꼬는 글이 쏟아졌다. "커피믹스 타 먹으면 진보고 아메리카노 먹으면 착취냐" "경기동부연합 쪽 간부들도 아메리카노를 즐겨 먹더라"…. '아메리카노'는 '아메리칸'의 이탈리아 말이다. 미국 사람들이 식민지 시절 진한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 마시는 것이 촌스럽다며 이탈리아에서 조롱조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에스프레소는 고온·고압에서 재빨리 뽑아낸다. 그러나 미국 가정과 사무실·음식점 대부분은 간단한 커피 기계에서 숭늉처럼 묽게 내려 마신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팔리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커피여서 사실 미국과 별 상관이 없다. 유시민씨는 "부르주아 취향이라 욕해도 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면 슬프지 않겠냐"고 했다. 입맛엔 국경이 없다. 거기에다 이념까지 씌워서야 입맛 달아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