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여성에 문 연 오거스타

2005년 2월 콘돌리자 라이스가 독일 비스바덴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내렸다. 사열을 받으려고 서 있던 장병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각 서열 1위, 대통령 승계 서열 4위인 미 국무장관이 검정 가죽 스커트 위에 종아리까지 덮는 긴 블랙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금박 코트 단추 일곱 개는 풀어헤친 상태였다. 맞바람에 코트 앞섶이 열리자 굽 높은 롱부츠가 드러났다. 2000년 세계를 휩쓴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가 했던 차림과 똑 닮았다.

▶언론이 화들짝 반색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위풍당당 지휘관 스타일'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그 무렵부터 라이스 장관 이름 앞뒤에는 '대담무쌍' '절대권위'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해 라이스는 골프에 입문했고 주말마다 필드를 찾았다. 엊그제 '금녀(禁女)의 성(城)'이요 '성(性) 차별의 상징'이라던 미국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라이스를 첫 여성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최고 연봉을 받는다는 여성 은행가 달라 무어도 함께였다.

▶1933년 문을 연 오거스타는 꼬박 80년 동안 백인 남자만 회원으로 받았다. 콧대 높기가 영국의 고집불통 남성 골프장을 무색케 했다. 여성단체가 오거스타에서 이따금 시위를 벌였지만 "우리는 공공기관이 아니라 남성 사교 모임"이라며 끄떡도 안 했다. 그러다 2002년 '오거스타 멤버십 논쟁'이 벌어졌다. 전미여성협회가 오거스타 클럽에 편지를 내 "남성 전용 골프장에서 (미국 최고 권위) 마스터스대회를 여는 것은 성차별"이라고 따졌다.

▶오거스타 클럽도 맞받았다. "보이스카우트·걸스카우트가 따로 있듯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단일 성(性) 클럽을 조직할 도덕적, 합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 심지어 전미여성협회장을 "무례하다"고 나무랐다. 그러나 논쟁을 지켜보던 토머스 와이먼 CBS 사장, 존 스노 재무장관이 오거스타 회원증을 반납해 버렸다. 여성·시민 단체와 언론도 압력을 가했고 2003·2004년 오거스타에서 열린 마스터스대회는 스폰서 광고 없이 방송 중계를 타야 했다.

▶오거스타 클럽이 결국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얘기가 몇 년 전부터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오거스타 첫 여성 회원으로 라이스 전 국무장관을 꼽고 있었다. '골프 성지(聖地)'라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도 2007년 금녀 벽을 허물고 브리티시 여자오픈 대회를 열었다. 미국엔 1만6000개 골프장이 있다. 그중에 워싱턴 근교 '버닝 트리' 같은 스무 개 남짓 골프장이 아직 여성 출입을 막고 있다. 0.1%쯤이다. 남녀평등 인권국의 목에 걸려 있는 마지막 가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