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패션은 강남 스타일? 아니 '붕괴' 스타일!

이들은 따라 할 수도 없고, 함부로 따라 해서도 안 되는 옷을 즐겨 입는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여주기 싫으면 소매를 찢어버린다. 출렁이는 뱃살을 숨기려고 애쓰기는커녕 배꼽까지 훤히 내놓을 때도 있다. 정장 윗옷 아래 반바지를 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른바 '스타일 붕괴' 패션이다.

가수 싸이가 노래 '강남 스타일'로 인기몰이를 하며 이런 옷차림으로 무대에 서자, 한때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지탄받던 이들까지 새삼 '대세(大勢)'처럼 떠오르고 있다. 개그맨 정형돈, 가수 데프콘, 개그맨 노홍철, 가수 박진영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단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뻔뻔하고 자신만만하게 옷을 입는 이들을 두고 디자이너와 패션 평론가들은 "스타일 법칙에 몸을 맞추는 대신, 기존 스타일을 과감하게 부숴버렸다는 점에서 보는 이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스타일 붕괴?… 제대로 입지 못할 바에야 맘대로 입는다

SK마케팅앤컴퍼니 황원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요즘 대중문화계에서 바람을 몰고 온 연예인들을 살펴보면 옷을 정석대로 잘 입는 사람보단 자기 멋대로 입는 '묻지 마' 스타일이 많다"면서 "이들을 '스타일 붕괴자'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고 했다.

몸매가 근사한 사람, 값비싼 옷을 멀끔하게 소화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 대중은 이들에 열광하는 것만큼이나 피로감을 느껴왔다는 것이다. 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명품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싸이, 요지 야마모토 같은 디자이너 옷을 싸구려 스타킹과 섞어 입는 노홍철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해방감을 느낄 것"이라고도 했다.

'청담동 트렌드 리더'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 마켓'의 한태민 대표는 이들 연예인의 옷차림을 두고 "일부 제대로 입지 못할 바에야 맘대로 입겠다고 작정한 패션 같다"고 평했다. "싸이·노홍철·박진영·김장훈 등은 패션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연예인이지만, 이를 일부러 무시하고 옷을 입는다. 어차피 파티 문화나 연회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을 일이 거의 없다. 이렇게 대충 입을 바에야, 이를 조롱하듯 마음대로 입기로 한 것 같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다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는 "대충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옷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시행착오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했다. 가령 싸이는 윗옷 겨드랑이가 땀에 흠뻑 젖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종종 팔 부분을 잘라내고 입는다. 가수 김장훈은 마른 몸을 가리고 훤칠한 키를 강조하기 위해 치맛자락처럼 풍성한 옷을 즐겨 입는다.

웃음을 궁극의 액세서리로 활용한 경우도 있다. 패션 컨설팅 회사 '크리에이티브 팩토리'의 안수경 이사는 "정형돈은 스스로 '개화동 오렌지족'이라는 신조어를 붙여주면서 자신의 촌티 나는 옷차림을 대중에게 일부러 각인시킨 경우"라고 했다. "영화 속 건달이 걸쳤을 법한 금목걸이와 칙칙한 스웨터, 엉덩이가 꼭 끼는 바지를 조합해 '정형돈 스타일'로 굳혔다. 남들이 흔히들 '일수 가방'이라고 말하는 작은 손가방을 당당히 들고 다니며 '클러치 백'이라고 부르는 데프콘도 비슷한 경우다."

◇원조(元祖)는 안나 피아지, 엘비스 프레슬리?

그렇다면 이들의 옷은 하루아침에 상상력만으로 완성된 것일까. 안수경 이사는 "지난 8월 초 타계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패션 디렉터 안나 피아지(Piaggi) 등이 사실 스타일 붕괴자의 원조"라고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형태와 색깔을 겹쳐 입었다. 그 덕에 패션과 대중문화가 한 단계 진화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한태민 대표는 "영국 록가수 데이비드 보위(Bowie),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Presley) 등도 알고 보면 유명한 스타일 붕괴자일 것"이라면서 "이들의 옷을 패러디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새롭고 엉뚱한 패션이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