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8.29 09:33

MY MENTOR

현명한 스승을 뜻하는 ‘멘토’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유래한 말이다. 전쟁에 출전한 오디세우스왕의 노우(老友)이자, 왕을 대신해 그의 아들을 이끈 스승 멘토르가 오늘의 멘토가 되었다. 어쩌면 전쟁 같았을 당신의 하루하루, 용기와 희망을 가르쳐준 멘토르는 누구인가?


배병우 사진작가

멘토 서양화가 이대원

이대원(1921~2005) 화백은 나무와 과실 등 자연을 주제로 한 독자적인 화풍으로 우리 화단을 이끈 거장이다. 홍익대 총장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으로 활동하셨다. 나는 1975년 홍익대 미대 조교 시절 학장으로 계시던 이 화백과 첫 인연을 맺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곁을 지켰다. ‘미술계의 신사’로 불릴 만큼 실력이나 인품 면에서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분을 존경했다. 생전 가까운 이들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특히 대단하셨는데, 개인전 하는 후배들의 작품을 일일이 사주고 꽃값이라며 금일봉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예술계에는 자신의 아성을 쌓기 바빠서 타인에게 베푸는 유연성을 가진 이가 드문데, 그런 가운데 이 화백은 우리의 귀감이 되셨다.

멘토의 말씀

생전 이 화백의 그림 사진은 모두 내가 찍었는데, 제자가 당신의 그림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 너한테 양복 한 벌 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농담으로 “두 벌 해주시면 안 되겠어요?”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네가 우리 사위와 같으냐. 안 된다” 하시더니, 막상 양복집에 가 보니 두 벌이 주문돼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병우 네 사진은 언젠가 세계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그러니 늘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하라.”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니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박동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부회장

멘토 아버지 박홍식

미군정청에서 일하셨던 아버지(1902~1983)는 해방 후 경기여고, 배화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셨다. 워낙 깨어 있는 분이셨기 때문에 나는 당시의 남아선호사상 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6·25때 자식 둘을 잃은 아버지는 유독 우리 형제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나는 사회 첫 발을 신문사 기자로 내디뎠다. 1960년대 초 각 신문사에서 공채를 막 시작할 무렵 우연히 동아일보 1기 수습기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여성은 졸업 후 곧바로 결혼을 하던 시절이었고, 여기자란 마치 미개척지와 같았다.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란 나 역시 기자라는 낯선 직업에 뛰어드는 게 두려웠다. 그때 아버지께서 많은 용기를 주셨다. 도전정신을 가르쳐주셨다. 1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한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돌아와서는 대한가족계획협회,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유니세프의 문을 두드리기 몇 년 전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UN 산하 기관에서 일하게 된 딸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이다.

멘토의 말씀

“인간관계에서 절대 비겁하지 말라. 권력 앞에 특히 당당하라. 물러나 있지 말고, 늘 적극적으로!”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을 돕는 삶이 도움을 받는 삶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내가 50년 넘게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아버지의 이 같은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멘토 아버지 이상신

아버지(1927~2011)는 목회자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럼에도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외한 것은 무엇이든 경험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스톱과 맥주를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네가 비록 기독교인이나 남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오락이나 술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탐닉하지는 말거라”는 뜻을 전하셨다. 유신 시절 군 장교 출신임에도 단상에서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셔서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말기에는 목회자가 없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실 무렵 치매와 중풍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늘 웃음으로 대하셨다. 올바른 삶을 평생에 걸쳐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멘토의 말씀

“무조건적인 금기는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라.” “네 자신의 정신이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배려해서 행동해야 한다. 너는 자유롭다고 행동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며 남을 위해 살아라.”


유재학 농구감독(울산 모비스 피버스)

멘토 건동대 총장 방열

방열 총장님은 과거 현대나 기아 등 내로라하는 실업팀의 농구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하신 분이다. 대학 졸업 후 내가 기아의 첫 창단 멤버로 활동하던 무렵 방 총장님이 감독으로 계셨다. 그때 처음 뵙고 지금까지 27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방 총장님은 내게 농구 스승이기도 하지만, 삶 자체에서 워낙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선수에서 지도자로, 학자로, 총장으로… 늘 연구하고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벌써 일흔이 넘으셨지만 변함없는 노력가다. 그 와중에 후배나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늘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기도 하다.

멘토의 말씀

“언제나 메모하고 기록하라.” 지도자로서의 기본은 기록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그분 역시 농구에 대한 기록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계신다. 그만큼 매사에 철저하시다. 농구감독으로서 그분께 많이 배운다.


유경희 미술평론가

멘토 루이즈 부르주아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는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미국의 설치미술가다. 에로스, 즉 생명력의 극치인 여자. 그녀는 70세에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80세에 이르러서는 아예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무려 4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세계의 젊은 예술가들을 작업실로 불러들여 토론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100세까지 예술과 함께 살았다. 나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녀의 80대 때 얼굴을 컴퓨터 배경화면에 깔아놓았다. 나도 그녀처럼 멋지게 늙고 싶다.

멘토의 말씀

누군가 부르주아에게 물었다. “예술을 왜 하는거죠?”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사랑받고 싶어서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예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나는 예술의 순기능을 믿는 낙천주의자다. 낙천주의는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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