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젠 망설이지 말고 떠나 보렴

누이가 섬에 뿌리내린 지 10년이 넘었어도 한번 찾아보러 선뜻 길을 나서지 못하는 아우야. 일 때문에, 사람 때문에 혹은 시간이 없다고 늘 핑계만 댈 뿐 제 몸 하나 훌훌 털지 못하는 답답한 인사야. 나 같은 맹문이가 심봉사 눈 뜨듯 세상 이치를 알아차리게 된 건 자연의 큰 섭리를 통해서였단다. 그 시작은 우습게도 도시의 가까운 산으로 아줌마들끼리 운동 삼아 나선 것이었어. 애들이 쓰던 책가방에 찰밥과 나물 무침을 잔뜩 담아 짊어지고 개울가에서 배 터지게 나누어 먹고 종일 수다 떨다 돌아오기를 여러 번, 어느 날은 용기를 내서 산 정상에 올랐단다. 재미가 붙자 배낭에 등산화로 모양을 갖추고 먼 도시의 높은 산을 넘보기 시작했어. 간이 커진 우리는 기차를 타고 지리산 원정을 갔지.

산장에서 1박을 하고 돌아왔을 때 어머나! 집은 그대로였어. "나만 없어 봐라, 집구석 꼴이 엉망일 테니"라며 큰소리쳤건만 어미가 없어도 아이들은 굶지 않고 등교했으며, 내가 챙겨주지 않아도 남편은 출근을 했던 것이야. 그러나 더 큰 충격은 자나깨나 조바심을 내던 내가 지리산 자락과 씨름하며 집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점이었지. 더군다나 그 까맣게 잊어버리는 시간에 묘한 에너지가 충전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놀라움은 대단했단다.

남편이 퇴직한 후 과감히 육지 살림을 청산하고 섬으로 들어온 용기 속에는 그 변화의 싹을 키운 내공이 자리 잡고 있었을 거야. 한라산 기슭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남는 방 세 개로 민박을 시작했지. 할 줄 아는 게 밥하고 청소하는 것뿐이어서 시작한 작은 민박집에서 내가 배우는 세상도 만만치 않았어. 늘 가방을 꾸려 떠나온 사람들을 만나고 살잖아. 그들은 며칠 동안 섬을 뒤지다 파김치가 되어 자기가 떠나온 자리로 돌아가지. 떠나오기 전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우리와 친근해지고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함께 고기 구워 소주를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고 간단다. 집으로 돌아간 뒤 일부러 산 책, 잘 담근 술이나 고추장은 물론 추수한 쌀을 한 가마니나 보내주신 늙은 농부도 계셨어.

우리 부부가 사람 좋고 정이 많아 귀한 인연들이 이어지는가 싶어 잘난 척하지 않았겠어?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단다. 힘차고도 무섭게 내리치는 파도며 파란 초원에 그림같이 뛰노는 말들, 야자 그늘에 곱게 피어난 동백꽃이나 아스피린을 삼킨 것처럼 정신이 나른하게 이완되는 독한 찔레 향기, 왕관을 쓴 한라산 기슭에서 빛나는 밀감나무와 저물녘 바다에 몸 담그고 보는 노을빛…. 사람을 숙연하게 하는 자연이 어느 순간 마음속 빗장을 스르르 풀게 만든 것이지. 여행지에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만 사실 누구나 서럽고 뜨거운 얼굴을 감추고 있거든.

몇 년 전 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와서 며칠 묵어간 적이 있었어. 요새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 부부는 유별나게 아이들의 응석을 다 받아주더라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어. 그런데 돌아가기로 한 날 태풍이 들이닥쳤고, 비행기가 못 떠서 관광객들은 발이 묶였지. 정전이 되자 바닷가 아는 횟집에서 활어(活魚)를 빨리 갖다 먹으라고 연통을 해 왔더구나. 함께 회도 뜨고 찌개도 만들어서 소주 몇 잔을 기울이다가 그들 부부가 이별여행을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이별여행이라니! 그런 건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었나? 어미 아비가 한 명씩 맡아 기르기로 했다는 어린 형제는 자기들에게 곧 닥칠 운명도 모르고 철없이 장난질을 치는데, 우리 부부는 그만 벙어리처럼 목이 막혔단다.

깜깜한 천지를 흔드는 태풍도 아랑곳없이 재롱떨다 쿨쿨 잠이 든 어린 것들을 눕혀놓고 어른 넷은 촛불 앞에서 늦도록 잠들지 못했단다. 다음날 아침은 무섭게 고요했어. 바다도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고 투명한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더구나. 마당에 찢겨 뒹구는 나뭇잎과 참혹하게 떨어진 꽃잎들만이 간밤 광풍(狂風)의 흔적이었지. 그렇게 부부가 떠난 지 몇 달 뒤 연락이 왔어. 그냥 다시 잘 살기로 했다고.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때가 되면 다 지나간다'고 하셨죠? 저희는 그 말씀을 오래 기억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냥 떠나봐야 한다. 여행을 갔다 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이 딱 하나 있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야. 여행이란 치유(治癒)의 시간이라고 생각해. 누군가 이런 시를 썼지? 얕얕한 눈발이 쌓이면 백양나무 생가지도 뚝 부러뜨린다고. 작은 상처가 쌓여서 사람 하나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란다. 지난(至難)한 삶으로 얼룩진 잠바 하나 걸치고 강원도 어느 두메산골도 좋고 서해안 어딘가 폐허가 된 쓸쓸한 해수욕장이나 그냥 유명하지도 않고 지도에 이름만 있는 고장으로 불쑥 들어서 봐. 제주에 오면 물론 누이가 괜찮은 곳을 일러줄게. 서러워서 펑펑 눈물을 쏟아낼 곳도, 짐승 같은 인간을 향해 쌍욕을 할 만한 곳도 있단다. 그리고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깨닫게 해 주는 곳도 있어. 어쩔래? 이번 주말에 가방 하나 꾸리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