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멋 부리지 않아도 애틋해… 첫사랑이니까

20대 남녀가 첫 만남에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키스를 한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 키스 후 잠깐 대화를 나눈 이들은 아예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남녀가 아무 이유 없이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원래 사랑에 빠지는 데 특별한 이유야 없겠지만 영화에서 이런 개연성 없는 설정은 욕먹기 딱 좋다. 그럼에도 칠레 출신 크리스티안 히메네스 감독의 '훌리오와 에밀리아'에서 젊은 연인이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아무 거부감이 없다. 첫사랑엔 모든 걸 눈감고 넘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20대 후반의 작가 지망생 훌리오(디에고 노구에라)는 어느 날 저명한 소설가 가즈무리(휴고 메디나)를 만나 신작 소설의 타이핑 작업을 의뢰받는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무산되고, 훌리오는 자신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직접 가즈무리의 소설을 쓰게 된다.

영화는 훌리오의 8년 전과 지금을 번갈아 보여준다. 스무살의 훌리오와 그의 여자친구 에밀리아(나탈리아 갈기니)는 여느 어린 연인들처럼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점점 멀어진다. 8년 후 훌리오는 옆집에 사는 여자친구 블랑카(트리니다드 곤살레스)와 함께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담박하게 지낸다. 훌리오의 첫사랑만큼 애절하진 않지만 부러운 관계다.

요즘 스크린에는 유독 '첫사랑'이 넘쳐난다. 누구나 해봤지만, 누구나 끝까지 이룰 수는 없는 첫사랑에 가슴이 설레고 시린 건 조건반사에 가까운 반응일 것이다. 그래서 첫사랑을 다룬 영화엔 감정을 넘치게 담지 않아도 된다. 이 영화의 미덕도 거기에 있다. 멋을 내거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첫사랑의 풋풋한 기억과 이를 애틋하게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 전반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해 유명 문학작품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영화도 역시 한 편의 소설 같다. 3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이것이 포인트!

#대사 “쓸모없을지도 모르지만, 고대 시간과의 보이지 않는 유대감을 만드는 행위 같은 거야.” (과외받는 학생이 ‘라틴어는 왜 배우냐’고 질문하자 훌리오가 한 대답.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장면 스무살의 훌리오가 에밀리아와 잠들기 전 매일 밤 침대 맡에서 책을 소리 내 읽는 장면. 유명작가들의 대표작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분들 보세요 한때 소설 같은 사랑을 꿈꿨던 ‘문청’(文靑·문학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