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첫 해외 공관 되찾아 할아버지도 기뻐하실 것"

"할아버지(고종 황제)가 이곳을 일제(日帝)에 빼앗겼을 때 얼마나 울분을 삼키셨을까. 또 102년 만에 되찾은 것을 하늘에서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상상하니 괜히 눈물이 나네요."

경술국치 102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오후 미국 워싱턴 DC 로건서클에 위치한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앞. 고종 황제의 친손녀로 '조선 왕조 마지막 공주'로 불리는 이해경(83) 여사는 구한말 대한제국 자주 외교의 의지와 망국(亡國)의 한이 동시에 깃든 이 건물 앞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고종은 1891년 소용돌이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외교로 국가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생각으로 당시로써는 거금인 2만5000달러를 들여 백악관 근처에 첫 해외 상주 공관 건물을 사들였지만, 1910년 경술국치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 최근 우리 정부가 현 미국인 소유주와 매입계약을 체결하면서 이 건물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이 여사는 2005년부터 워싱턴한국역사보존협회 윤기원 회장과 함께 공사관 강탈 과정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을 미 주류 사회에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7선 연방 하원의원 출신 로널드 콜먼 변호사가 이 취지에 공감해 무상으로 법률 지원을 해주고 미 의원들의 지지 성명을 받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여사는 "워싱턴 공사관은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의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것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여사는 최근 일본에서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부인하는 발언 등이 나오는 것에 대해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온다"고 했다. 그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내 또래이다. 이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데 어떻게 일본 정치인들은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느냐. 사람들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여사는 "비록 일본이 우리 집안을 완전히 망하게 했지만, 난 보통 일본인들에게는 악감정이 없다"며 "하지만 일본 정치인들을 보면 과연 역사를 제대로 배우기는 했나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 여사는 당초 워싱턴을 방문한 길에 윤 회장과 함께 주미 일본대사관에 항의의 뜻을 전하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윤 회장이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고, 준비 없이 갔다가 수모만 당할 수도 있다"고 해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다섯째 딸로 일제 치하에서 궁궐 생활을 했던 이 여사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이후 줄곧 미국에서 생활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취직해 27년간 일했다.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의친왕 명예 회복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음속의 울분과 분노는 많이 사그라졌으나 죽기 전에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는 모습만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