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짝사랑 20년, 그림으로 활짝 피었네

열두 달 숲 관찰일기

강은희 글·그림｜현암사 | 296쪽｜1만6800원

"숲의 풀과 나무들은 봄과 여름이라는 규칙적인 일상을 빠져나온 다음 울긋불긋하고 쓸쓸하고 눈부시고 불안하고 따끈따끈하기도 한 별난 계절을 유쾌하고 화려하게 즐긴다. 가을은 앞으로도 한참 더 연주될 예정인 곡들을 찬바람과 서리와 가을비,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는 가을볕에게 내어준다."(169~170쪽)

저자는 야생화 화가다. 2004년 처음 야생화를 그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에게 야생식물은 스승, 한 번도 지겨워본 적 없는 오래된 사랑이다. 그래서 일기까지 썼다. 이 책은 스무 해 넘게 야생화를 짝사랑해온 저자가 365일 숲의 흐름을 한눈에 정리한 생태 그림일기.

관찰 시기는 2009년 3월부터 2010년 2월까지, 장소는 북한산 정릉탐방센터의 숲 한 자락이다. 그 일대에서 군집과 군락을 이룬 종을 살피되 인위적 조림지, 외래식물, 탐방객들의 인위적인 식재 등은 뺐다. 순수 야생화에만 집중하겠다는 뚝심으로 날마다 숲을 관찰해 작은 생명들의 소소한 변화를 130여컷의 세밀화로 그렸다. 조사방법은 편안하다. 숲을 둘러싼 길을 그냥 따라 걸으며 바라보고, 헛생각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

편안한 산책길처럼 글은 담백하고 솔직하게 야생화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전한다. 포근해진 바람에서 봄을 느끼는 세인들과 달리 저자는 귀룽나무가 발산하는 금빛 후광에서 봄이 온 걸 안다. 자연의 들숨 날숨에 모든 것을 맞춰 살던 시절, 옛 사람들은 귀룽나무에 새잎이 피는 걸 보고 농사를 준비했다.

초봄이 되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서 풀도 나무도 몸살을 앓는다. 이 위기를 잘 넘기면 온몸 가득 노랗게 물든 제비꽃이 핀다. 옛날엔 제비꽃이 피면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하여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제비꽃이 만발하면 쓰레기가 는다. 제비꽃이 필 무렵이면 따뜻한 숲길을 걷는 사람도 많아지는 탓이다. 비닐봉지가 박힌 자리는 다람쥐의 은신처일 수 있고 제비꽃의 씨가 날아가 새싹을 틔우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숲은 동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동물은 숲에서 후손을 낳는다.

행간에서 싱그러운 풀 내음이 물씬 피어오른다. 숲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던 것, 무심히 넘겨 버린 것을 돌아보게 하는 스승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디지털이 넘쳐나는 세상에 색연필로 그린 아날로그적 터치가 새삼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