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무심한 공포

낭자한 선혈, 참혹하게 망가진 시체, 치솟는 불길. 흔히 '재난'에서 우리가 연상하는 이미지다. 사진가 하태범(38)은 신문의 전형적인 재난 보도 사진에서 피와 시체와 불길 같은 '공포'와 관련한 전형적인 요소를 제거했다.

방법은 이렇다. 먼저 폭탄 테러로 부서진 건물, 지진으로 쓰러진 집과 나무, 화재로 불타버린 동네 등 재난의 '현장'만 아크릴판, 석고 등을 이용해 원본의 30분의 1 정도 크기의 미니어처로 제작한다. 이렇게 만든 미니어처를 하얗게 칠한 후 그는 사진을 찍는다. 그의 렌즈에 담긴 풍경은 감정적 요소를 배제한 채 탈색(脫色)된 '재난'. 유령처럼 무기력하고,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내 작업은 재난 자체보다는 재난 장면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문에 실린 재난 사진은 끔찍하고 처참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 사진'은 사실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무심하지 않을까." 하태범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남의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개 놀라고 끔찍해할 뿐, 진심으로 그 고통에 공감하진 않는다. '무(無)'의 빛깔인 흰색을 칠해 무심한 화면을 만든 것은 그 타자의 고통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다.

내달 7일까지 서울 동숭동 갤러리정미소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제목은 'WHITE'. 전시된 사진 8점 모두 하얗게 탈색된 재난 현장이다. 예멘 내전, 동일본 대지진, 이라크 바쿠바 폭탄테러, 콜롬비아 경찰서 테러 등 최근 언론에 등장한 사건 현장이다.

중앙대 조소학과 출신인 하태범은 200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으로 유학 갔다. 유학 전엔 '존재', '사유' 등 철학적 주제를 담은 조각 작업을 했던 그는 낯선 땅에서 소수자로 살면서 시사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학 중에 만난 아랍 친구들은 테러에 대해 우리와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더라. 강대국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테러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재난 이미지를 주제로 삼으면서 '사진'으로 선회했지만, 피사체를 직접 제작함으로써 조각가로서의 특기도 살렸다. 이 방식은 정치적·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실물 크기의 종이 모형으로 제작해 사진을 찍는 독일 작가 토마스 데만트(Demand·48)를 연상시키지만, 현장의 이미지와 인상에 초점을 맞춘 데만트와 달리, '이미지와 거리 두기'를 꾀했다는 점에서 하태범만의 것이다.(02)743-5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