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작가, 이번엔 남의 바느질을 탐하다

지금까지 자기 바느질에 몰두했던 그는 이제 '남의 바느질'로 시선을 돌렸다. '실과 바늘의 작가' 김수자(55)가 신작 '실의 궤적' 연작으로 돌아왔다. 16㎜ 카메라로 촬영한 이 영상에서 작가는 이불보를 꿰어 바느질하고, 보따리를 만들어 싸는 노동집약적 작업에서 벗어나 '타인의 바느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내 작품은 예쁘지 않아요"

내달 10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의 제목은 'To Breathe(숨쉬기)' '실의 궤적' 연작 두 편이 나온다. 23분40초짜리 영상작품 '실의 궤적-챕터2'는 레이스의 섬세한 패턴과 유럽 건축물의 정교한 구조를 병치시켜 그 둘이 닮은꼴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찰각거리며 돌아가는 프랑스 칼레 레이스 공장 기계들의 움직임과 인간의 뼈로 장식된 체코 '해골성당'의 내부, 알로에 잎에서 추출한 실로 레이스를 뜨는 크로아티아 수녀들의 모습과 두오모 성당 등 유럽 옛 건축물의 정교한 창살·천장 버팀살 등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식이다. 전시에 함께 나온 '실의 궤적-챕터1'(2010)에선 민속 의상을 바느질하는 페루 사람들, 민속 의상의 문양과 마추픽추 대자연의 지리적 구조를 교차시켜 보여준다. "레이스 뜨기의 여성성과 건축의 남성적 형태, 인공과 자연을 함께 놓아 음(陰)과 양(陽)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

미디어 작품치고는 꽤 긴 시간,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비슷한 영상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구조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지루하다는 감 없이 계속 눈길을 붙잡는다. 전시에 함께 출품된 전작(前作) '뭄바이:빨래터'(2008), '거울' 시리즈(2010) 등과 마찬가지로 예쁘고, 화사하고, 감각적인 영상미 덕이다. 실과 바늘, 천을 이용한 작업 덕에 '한국 여성 미술가'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그이지만, '여성적 작업'이라는 호명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바늘은 침(針)처럼 '치유'의 기능을 지닌 동시에 공격적 기능도 가졌어요. 여성적이라기보다는 양성적 재료입니다. 소위 '여성적 매체'를 사용했다는 작업이 공예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여성성'으로 전락하겠지만,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됐다면 그건 이미 '여성성'의 범위를 뛰어넘은 거겠지요." 작가는 자기 작품을 "예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한국적 색채 가미한 '바느질'로 세계의 주목 받은 여자

김수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실·바늘·천 등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였다. "1983년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다 이불보에 바늘이 꽂히는 순간 우주적 에너지가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는 설명이 그를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지 '바느질'만으로 김수자를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여성의 소박한 노동인 '바느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주디 시카고(Chicago·73)를 비롯한 제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1970년대에 이미 즐겼던 작업.

김수자는 보편적 '여성 미술' 소재인 바느질에 조각보·보따리 등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조각보 작가'에 머물지 않고 설치·퍼포먼스 등을 활발히 벌였고, 90년대 중반 미디어 작가로 거듭났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자신의 뒷모습을 '동양 여인의 심볼'로 작품에 등장시킴으로써 '오리엔탈리즘'적 마케팅 기법(?)도 활용했다.

김수자의 작품은 점점 '여성의 노동성'과는 멀어지고 있다. 트럭에 쌓인 보따리 꼭대기에 앉아 어린 시절 살던 전국의 마을·도시 2727㎞를 11일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영상작품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1997), 작가 자신이 '바늘'이 되어 도쿄·델리·상하이 등 세계 대도시 8곳의 군중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늘여인'(1999~2001) 시리즈 등은 모두 영상 작품. 그럴수록 김수자는 점점 글로벌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아마 이런 사유적 해석 덕분일 것이다.

"바늘이 인간의 '몸'이라면, 실은 인간의 '마음'이다. 우주(宇宙)는 결국 날실과 씨실의 교차, 바늘과 실의 행위처럼 '짜여(weave)'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품을 통해 그 '짜임'의 '경계'를 보여주고 싶다. 이를테면 날숨과 들숨, 그 사이에 있는 '삶과 죽음'의 한순간 같은 것."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