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잊을 수 없는 두 사람

1953년 7월 27일, 6·25 남침 전쟁이 휴전으로 들어갔다. 피란 갔던 대학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왔다. 나도 서울로 올라가 먼 친척 할머니의 쪽방에서 지냈다. 서울은 처참한 폐허였다. 학비 조달이 어려웠던 나는 그해 초겨울부터 노동판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한 일은 벽돌을 지고 2~3층 공사장으로 오르는 일, 뙤약볕 아래서 종일 도로 양쪽의 배수로를 파올리는 일, 먼지가 비안개처럼 쏟아지고 100마력짜리 모터 9대가 윙윙 우는 정부미 도정공장에서 쌀가마니를 등에 지고 45도 경사의 흔들발판을 곡예 하듯 발발 떨며 올라가 꼭대기에 부리는 일, 가정교사 등이었다.

그중 하나가 청소차량 보조였다. 연일 영하 10도 아래로 수은주가 떨어지던 혹한에도 새벽이면 일어나 당시 내가 살던 영천동에서 마포까지 정신없이 뛰었다. 마포경찰서 정문에서 덜덜 떨며 기다리면 4t 청소트럭이 와서 멈췄다. 경찰서 안에서 마포서 위생계 순경이 나와 조수석에 동승했다. 나는 잽싸게 뒤에 올라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공덕동 골목을 뒤지며 순경이 종을 흔들면 부녀자들이 쓰레기를 들고 꾸역꾸역 나와서 나를 향해 마구 던졌다. 나는 온몸에 쓰레기 세례를 받았다. 수북이 쌓이면 꼭대기에 코를 박고 엎어져 찬바람을 피했다. 트럭은 칼바람을 가르며 한강 둑 위를 쌩쌩 달리다가 둑 아래 벌판에 섰다. 쇠스랑으로 수천 번을 파 내렸을까, 바닥이 보이면 다시 시내로 달렸다. 몇 번을 왕복하면 해가 졌다.

하루는 퇴근 때 트럭 기사가 타라고 했다. 차 안은 춥지 않아 살 것 같았다. 서대문경찰서 뒤에 주차하더니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더니 "아주머니, 거 따끈한 정종하구 소갈비 좀 몇 대 주슈"했다. '뭐라고?' 깜짝 놀랐다. 곧 숯불 위에서 갈비가 파란 연기를 내며 지글지글 익어갔다. 살아오면서 언제 갈비 구경을 해봤던가. 그 귀한 음식이 내 앞에서 익고 있었다. "자, 들지.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고생이 많구먼. 성공할 거야. 견뎌내고 꼭 성공해야지…" 하며 술잔을 권했다. 갈비를 입에 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 젖은 갈비!' 따끈한 정종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온몸이 활활 탔다. 약간 검고 갸름한 얼굴의 그 트럭 기사를 잊을 수가 없다. '이 은혜를 언젠가는 갚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다음 해 6월 하순, 일감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다 점심도 굶은 채 종로 신신백화점 신축공사장 앞까지 왔다. 전차 정류장에서 숙소로 가려고 전차표를 살 참이었다. 바지의 호주머니를 뒤져 돈을 있는 대로 꺼내어 매표구로 밀어 넣었다. 그때 전차표 한 장에 7환이었다. 잠시 후, 전차표 대신 여자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튀어나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1환이 모자랐던 것이다. 여기저기 뒤지며 쩔쩔맬 때 길바닥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전쟁고아였다. 더위에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까만 얼굴에 흰 이빨을 내보이며 "아저씨, 여기 있어요. 히~" 하며 웃었다. 구걸한 몇 푼을 쥔 어린 주먹을 통째로 나에게 뻗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주저하다가 엉겁결에 1환을 뽑았다. 금방 생각난 말은 "야, 미안타. 응?"뿐이었다. 그때, 동대문 쪽에서 영천행 전차가 쉰 목소리를 내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었다. 복잡한 전차 안에서 몸을 비틀어 밖을 내다보려 애썼지만 볼 수가 없었다. 곰곰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이 지구가 생성된 이래, 어린 거지한테 동정받은 어른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이 은혜도 기어코 갚으리라.'

그러나 식솔들 부양에, 질병과 투쟁하느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약속을 어긴 채 흘려보낸 세월이 장장 50여년! 그러다가 2년 전, '이러다간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눈을 감을지도 모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 트럭 기사는 이미 이승을 떠났을 것이어서 접을 수밖에 없었고, 60대 중반쯤 됐을 그 거지 아이에게만 갚자고 마음먹었다. 식솔들 몰래 100만원짜리 수표를 마련해 가명으로 내가 애독하는 신문사로 보냈다. 돈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왔을 때 짐을 벗었다는 안도감 때문에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만일 그 아이를 못 찾거든 가난하고 선량한 미대 학생 중에서 뽑아 전해달라'고 했다. 하필 미대생을 지목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갈망하던 미대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덜 드는 경상계열로 진학했다. 미대에 진학해 봤자 물감 살 돈조차 없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련을 못 버리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기어코 고교 미술교사가 되었고 퇴임 후 지금까지 개인전도 열면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 거지의 은혜는 갚는 시늉이라도 냈다 치더라도 트럭 기사의 은혜 갚기는 이미 물 건너 간 이야기다. 저승에 가면 기어코 찾아뵙고 그간의 무례를 빌며 큰절을 올리리라. 그리고 그때 그 정종에 그때 그 갈비 몇 대도 꼭 대접할 것이다.